석훈에 대한 관심은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사그라졌다. 정신없이 업무가 쏟아져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몇 개의 프로젝트를 쳐내다 정신을 차리니 한 분기가 지나있았다.
한동안 장마가 이어졌다. 대개는 사무실에서 창문에 내리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업무를 하고 점심이 되면 음식을 배달시키고 몇 시간 간격으로 커피를 내리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시트에 몸을 기댄 채 한강을 지나치며 불빛이 가득한 강물 너머를 멍한 기분으로 바라봤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직원이 주문해 둔 샌드위치를 먹고 미팅을 하기 위해 한남동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로비에 위치한 카페는 건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 탄산수를 주문하고 클라이언트와 기계적인 대화를 나눴다.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 유리테이블에 놓인 흰 종이가 팔랑이며 움직였다. 지루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탄산이 맹물처럼 변했을 즈음에야 테이블 위의 서류를 정리했다.
로비에서 나오자 비는 그쳐있었고 습기가 느껴졌다. 상사에게 간략한 업무 보고 후 회사로 복귀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통화를 끊었다.
호텔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미팅을 했던 클라이언트가 지나가며 눈인사를 했다. 입에 담배를 문 채로 고개를 까닥였다. 장신의 키에 체크무늬 슈트를 입고 피로가 겹겹이 쌓인 상대의 얼굴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오후 4시였다.
신호등 앞서 서 잠시 고민을 하다 파란불이 들어와 무작정 길을 건넜다. 거리에 멈춰 서서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J가 말했던 전시가 근처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도를 확인하니 이곳에서 멀지 않은 위치였다.
머릿속에 내일의 일정을 헤아리고 갤러리로 무작정 향했다. 10분 남짓 걸어가자 지도가 가리키는 검은 건물이 보였다. 반 층을 올라가 육중한 문을 열자 크지 않은 공간이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중앙의 단상에서는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전시 목적과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남자가 잠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후에야 그가 석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러질 듯 예민한 실루엣과 안경 너머의 무심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뜻을 알 수 없이 목 언저리가 뻐근해졌다. 그날의 기억이 일순 머릿속에 펼쳐졌다. 여전히 나를 향한 시선을 무시하며 등을 돌렸다.
전시회는 브루클린 출신이라는 화가의 개인전이었다. 흰색 벽면에는 거대한 캔버스에 푸른빛에 가까울 정도로 창백한 피부를 한 사람들의 나체가 걸려있었다. 조각칼로 깎아 놓은 듯 마른 팔다리와 긴 머리를 늘어뜨린 거대한 나신 앞에서 어느 남자와 샴페인을 마셨다.
남자는 그림을 그린 화가가 어느 대학에서 공부했고 어느 학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자신도 그 학파에 심취해 있었고 사실 전 애인이 화가였고 그녀와 사귀는 3년 동안 수많은 예술적 영향을 받았고 지금 마시는 샴페인은 어느 지역에서 생산되었고 역시 가장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은 와인이며 자신은 어느 지역의 와인을 선호하고 좋아하는 와인바는 어디에 있으며 자신과 함께 그 와인바에 간다면 얼마나 훌륭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남자의 지긋지긋하고 일방적인 수다 덕에 석훈을 마음껏 의식하고 있을 수 있었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의 피부가 뻣뻣이 곤두섰다. 그건 분명 석훈의 시선이 닿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전애인과 와인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는 남자의 등 뒤로 석훈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석훈을 바라봤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잠시 당황하던 눈으로 석훈을 바라보던 남자가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
“안녕하세요. 희령씨 맞죠?”
오랜만에 만난 석훈은 어딘지 그날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아무런 위화감 없이, 책장을 넘겨 가볍게 다음 파트의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나가서 한 잔 하실래요?라고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였다. 그가 선선히 좋다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