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선 완행열차

별 것 아니지만 by 보리

by 김보리

광천읍 삼봉마을을 찾아갔을 때였다. 삼봉마을은 여는 시골과는 사뭇 달랐다. 다리만 건너면 바로 시장이 코앞이었고, 마을 내 논이 보이지 않았다. 집 앞 작은 화분 정도에 대파나 상추를 심는 정도가 전부였고 아주 가끔은 5~6평 정도의 밭에서 고추나 감자 등을 수확하거나 심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두 집 건너 한 집 있는 시골과는 달리 좁은 골목길을 따라 집들이 있는 것도 낯선 풍경이었다. 마치 인천의 한 달동네를 연상하게 하는 그런 마을이었다. 무엇보다 마을 서북쪽으로 장항선 열차가 지나간다. 늘 홍성역에만 정차했지 광천역에 정차해 본 적이 없던 내게 마을 주민들은 장항선 완행열차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었다.


집 앞 골목길에서 낙엽을 쓸고 있는 한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1964년생으로 마을 토박이였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아저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장항선 완행열차를 탔다. 차비를 마련하기 위해 마을 앞 냇갈에서 실장어 등을 잡아 삯비를 마련했다. 여느 사람들처럼 삶은 감자 하나 싸들고 가지 못해 주린 배를 움켜쥐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어찌나 늦게 가는지, 가는 역마다 정차했고, 간이역 간이매점에서 먹는 가락국수는 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났다. 4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한 서울역에서 아는 이의 뒤를 따라 양복점에서 재단 일을 배웠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이 없으니 그날 하루 배만 곯지 않아도 다행이었다. 재대 후 양복점에서 근무하면서 자신만의 양복점도 운영하게 됐다. 기성복이 등장하면서 양복점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줄어들었고 아저씨는 몇 년을 더 버티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벌써 20여 년 전이다. 아저씨는 부모가 남긴 집을 리모델링해서 살면서 건설 일용직을 다녔다. 어느새 기술도 배워 미장장이로 한때는 잘 나갔다고 한다. 건축도 시대적 조류가 있는 터라 요즘 미장을 하는 곳이 예전보다 수요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가끔 일이 있으면 불러주는 대로 나가 일을 하고 온다. 일이 없는 때에는 이 산 저 산 다니며 심마니 노릇도 한다. 어릴 적부터 산에서 노는 것이 취미였으니 어디에 무슨 약초가 있는 것쯤을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척척 알아낸다. 그 말을 건네는 반짝거리던 아저씨의 눈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사람들 인심도 좋고.”


마을에서 15분 정도만 걸으면 광천역이다. 시장이 있고 보령과 인접 지역이라 수많은 장사꾼들이 이곳을 통과했다. 장사꾼들만 아니라 통근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부녀자들은 주로 시장에서 생선이나 야채 등을 해와 머리에 이고 기차에 올랐다. 자식들 교육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다.


1936년생의 한 어머니는 이곳이 고향은 아니다. 다른 마을로 시집을 갔다가 먹고살기 위해 이 마을로 들어왔다. 교통이 편하고 장사치들이 많아 남편과 둘이 벌면 10 식구 먹고살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사글세로 시작한 살림이었다. 남편은 닭이나 토끼 등을 시장에서 받아와 서울로 가져가 파는 일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거리잽이’나 ‘되매기 장사’라 불렀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집에서 콩나물을 길러 시장에서 파는 일을 시작했다. 집에서 기른 콩나물은 인기가 좋았다. 두 다라이 가득 만들어도 몇 시간이면 동이 났다. 시장에 소문이 나면서 콩나물 장사가 늘어났다. 어머니는 콩나물 장사를 접고 근처 보령에 위치한 오뎅공장에 다녔다. 가끔은 공장 일이 끝나면 남는 오뎅을 주기도 했다. 누르스름한 오뎅은 그 당시 최고의 반찬이었다. 조리해서 먹는 것보다 뜨끈뜨끈한 오뎅을 그냥 먹는 것이 제일 맛있었다. 남은 오뎅은 8남매의 도시락 반찬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어머니를 ‘오뎅 아주머니’라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매일 아침 4시면 일어나 팔 남매 도시락을 싸고 서둘러 공장에 출근하는 일이 지속됐지만 자식들 커가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몰랐다. 지금도 큰딸에게는 제일 미안하다고 한다. 동생들 뒤치다거리를 하느라 정작 본인은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며 자식에 대한 미안함을 부끄럽게 내비쳤다.


나의 완행열차에 대한 기억은 이십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신입생 시절 동기들과 경기도로 가는 엠티를 위해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비둘기호를 탔다. 지하철처럼 마주 보고 앉게 되어 있는 좌석, 트레이를 밀고 다니며 사이다와 오징어, 과자 등을 판매하고, 기차와 기차 사이 틈에서 연신 담배를 피워대는 남자들, 휴가를 나온 군인들의 들뜬 얼굴, 그 좁은 객차에서 둘러맨 기타를 꺼내 두들기며 꺼렁꺼렁 노래를 부르는 대학생들, 선반 위에 올려놓은 짐 가방이 덜컹대는 기차에 못 이겨 다른 이의 얼굴로 떨어질 때의 낭패감, 다양한 사연과 감정, 표정들이 교차하던 완행열차였다. 지금은 경험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귀한 시간의 풍경들이다.


도시를 왕복하는 완행열차의 풍경은 딱 여기까지다. 지방을 연결하는 완행열차의 모습은 좀 더 삶의 질곡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여행이라는 즐거움보다는 삶의 고단함이, 완벽하게 일처리를 끝내고 뒤돌아 퇴근할 때의 단정함보다는 왁자지껄 어수선한 생활의 모습들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장면들이 완행열차에는 있었다. 좀 더 빨리, 좀 더 정확하게 이동하려는 직선의 길이 가지는 욕구보다 구비구비 돌아가는 완만한 곡선의 길이 주는 인생의 여유로움이 담겨 있는 장항선 완행열차다.


복선화를 앞두고 있는 장항선은 이제 곧게 뻗은 선로를 따라 더 빠르게 달릴 것이다. 멀리 기차가 지나간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다리 아래에 서서 기차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예전처럼 하얀 연기를 뿜어대며 오는 기차는 아니다. 다만 기차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면서 카메라 셔터에 손가락을 대고 기다리던 그 찰나의 순간, 내 옆을 통과하며 지나가는 시간의 바람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