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말 삼국시대였을까?
지난 시간까지 중국의 대표적인 삼국시대 이야기를 다룬 <삼국지연의>를 풀어 보았습니다. 이번 시간부터는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볼까 합니다.
우리는 학교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우리의 역사를 고조선과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배웁니다. 그런데 삼국시대를 정말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있던 가야는 왜 빠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주몽이 도망(?)쳐 나온 부여 역시 당연히 우리의 역사에 포함되어야 하는데 왜 부여는 삼국시대라는 말로 배제되어야 했을까요? 우리는 왜 이점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는 기원전 57~935년까지 992년 동안, 고구려는 기원전 37~668년까지 705년 동안, 백제는 기원전 18~660년까지 678년 동안, 가야는 42~562년까지 520년 동안, 부여는 기원전 200~494년까지 694년 동안 이 땅에 존재했습니다.
위의 표를 참고해서 보더라도 해당 시기의 전체적인 용어는 98년 동안 지속된 삼국시대보다는 45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오국시대로 갈음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라는 말 역시 무척 어색하기만 합니다.
고구려는 668년 나당 연합군에 함락되었고, 백제 역시 660년 나당 연합군에 함락되었지만, 가야는 562년 신라에 함락되었으며, 부여의 경우에는 고구려에 흡수되었습니다. 즉, 고구려와 백제는 사실 상 당나라의 힘에 의해 무너졌으며, 가야만이 온전히 신라에 의해 함락당했지만 가야를 끼워 넣으려면 사국통일로 정리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입니다.
물론 가야나 부여의 경우, 단일 된 국가가 아닌 부족연맹체의 성격이었기에 '국가'라는 명칭을 붙여주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452년이라는 긴 시간을 무시하는 것은 상당한 오류를 간직하고 넘어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위의 오국의 생성에서 멸망까지의 기간이 확실한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위의 연도들은 백과사전에 등록된 것으로 믿을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과사전 역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 <삼국사기>는 믿을만한가? 라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점은 바로 고구려나 백제에 관련된 부분들입니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세워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중국 후한 시대의 역사서 <한서> ‘지리지’에서는
“(기원전 107년에) 현토군은 호(戶)가 4만 5천 6개이고, 장정이 22만 1845명이었다. (그 아래에) 현이 3개 있었으니, 고구려현·상은대현·서개마현이었다.”
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고구려가 고조선 시대에 이미 고조선의 제후국형태로 이미 고조선 멸망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킬 때, 고구려라는 나라가 독립적으로 존재했었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는 고구려를 현으로 호칭한 것입니다. 현이라는 것은 당시 한나라에게 굴복한 일종의 이민족 자치구역을 의미합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고구려라는 나라는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다가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한나라의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독립적인 나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또 하나의 근거를 살펴보자면 ‘광개토대왕비’를 살펴보면 됩니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주몽의) 기업을 이어받았으며, □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광개토대왕)이 二九(18세)에 등극하여 영락태왕이라 일컬었다.”
고 광개토대왕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 부분은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광개토대왕을 주몽의 17세손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광대토대왕을 주몽의 12세손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연대를 밝힌 것이 김부식의 주장보다 믿을만하다는 점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5세대의 차이가 나는데, 1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고 하면 약 150년의 역사가 증발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근거는 당나라 고종과 그의 신하였던 가언충의 대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재미있게도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제가 멸망하고 8년이 지나도록 버티고 있던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지친 고종에게 신하인 가언충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구려의 비기(秘記)에서는 ‘900년이 안 되어 80대장이 멸망시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씨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가진 이래로 오늘날 900년이며(우리나라 장수)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 <삼국사기> 권22 ‘보장왕 본기’ 중
'건국 900주년이 되는 해에 80대장에 의해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고구려 서적의 예언을 활용하여, 고구려 건국 900주년이 되는 금년에 80세 고령의 장군인 이적을 파견해서 공격하면 올해는 꼭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해에 80세의 이적 장군이 평양성을 함락함에 따라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당나라가 668년 고구려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하면서 80세 노장에게 평양성 함락을 맡겨 자신들에게 하늘의 뜻이 함께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668년 당시 고종과 가언충은 고구려의 역사가 900년이라는 점을 인정했으며 한나라 때부터 이미 나라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장수왕이 남긴 광대토대왕비문에 따르면 37+150 즉, 기원전 187년에 고구려가 건국된 것이고, 당고종과 가언충의 대화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기원전 233년에 건국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나라가 기원전 202년 건국 되었으니 이쪽이 더 타당하게 느껴집니다.
고구려의 건국 연대가 달라지면 자연스럽게 백제의 건국 연대도 달라집니다.
주몽에게서 벗어나 나라를 세운 곳이 백제였으므로 백제 역시 2세기 정도 건국 연대가 당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김부식이 이런 선택을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로 신라의 역사를 더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신라가 다른 나라보다 원조인 국가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김부식의 뿌리를 살펴보자면 그는 신라의 핏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은 고려 태조에게 귀의해 경주 지방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김부식의 가족들은 모두 경주에 기반을 두고 살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사십 대 때에 송나라에 유학을 가서 송나라의 황제인 휘종에게 융숭한 대접과 함께 역사서인 <자치통감>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역사서를 쓰겠다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즉, 신라인의 핏줄이자 중국에 대한 사대(의존)성이 깊은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삼국사기> 자체도 사마천의 <사기> 형태를 그대로 본떠 ‘본기(本紀)’ 28권, ‘지(志)’ 9권, ‘표(表)’ 3권, ‘열전(列傳)’ 10권으로 구성했습니다.
물론 김부식이 혼자 <삼국사기>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그에게 신라는 물론 중국의 한나라 보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고구려와 백제는 인정하기 어려운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가치관은 결국 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 만에 다시 세워진 발해의 건국에 대해 <삼국사기>에서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 신라인들은 발해를 자신들의 땅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