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건무(2)
이 사진에서 보이듯 평양성은 바다와 가까운 편이었다. 육지에서 요동성주(고복인 추정)와 을지문덕이 엄청난 활약을 펼치긴 했지만 수나라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수군과 보급을 막아내지 못하면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수군을 맡은 것은 누구였을까? 바로 영양왕의 동생인 고건무였다. 그는 대동강 하구에 수나라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한 뒤 기습 공격을 하지만 바로 패배하고 달아났다. 그리고 다시 공격했다 달아나기를 반복했고, 수나라의 수군 사령관이었던 내호아는 자만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우문술과 우중문 형제가 끌고 올 별동대 30만을 기다려야 했으나, 내호아에게 고구려군은 자신의 수군만으로도 쉽게 함락할 수 있는 상대로 비쳐졌다. 그는 부사령관 주법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병사들 수 만명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밀고 들어갔다. 고건무는 자신의 병사 나누어 일부는 숨겨두고, 일부 인원으로만 맞상대하다 다시 도망치는 척을 하였다. 이에 신이 난 수나라 장수들과 병사들은 제대로 된 대오도 갖추지 못하고 고구려 병사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이때 고건무는 숨겨 두었던 병력을 드러내며 엉망이 된 수나라 군대를 급습했고, 도망치던 고구려 군사들 역시 발걸음을 돌려 수나라 병사들을 공격했다. 결국, 내호아는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쳤고 수 만의 수나라 군사 중 불과 몇 천의 군사만 돌아갈 수 있었다.
내호아는 대동강 하구에서 남은 병력을 수습했지만 이미 그들의 마음 속에서 고구려군은 무서운 상대로 자리잡았다. 후에 수나라의 별동대 30만이 도착했지만 이미 엉망이 된 수군과 힘을 합치긴커녕 기다렸던 보급도 받지 못하면서 사기는 더욱 떨어질 뿐이었다. 보급을 받지 못한 별동대는 을지문덕의 계략에 속아 서둘러 돌아가려다 살수에서 몰살에 가까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처럼 뛰어난 성과를 낸 고건무는 형 영양왕의 뒤를 이어 왕의 자리에 앉는데, 이 사람이 바로 영류왕이다.
당시에는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 역시 아직 세력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고구려에서는 이 틈을 타서 우리도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 땅을 공격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도 했다.
"나는 지금 굳이 전쟁을 일으켜 다시 백성들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보지 않겠다."
영류왕은 본인이 전쟁에서 얻은 성과로 왕이 된 인물이었으나, 그래서인지 오히려 전쟁을 원치않는 평화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마침 자신들이 힘을 정비하기 바빴던 당나라의 이세민은 먼저 사신을 보내왔다.
"우리가 수나라 때에 서로 전쟁을 벌여 포로가 많이 있으니, 서로의 포로를 교환하며 양국 간의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 어떠한가?"
영류왕은 전쟁에 지친 백성들이 안정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들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그러나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하여 왕이 된 당태종 이세민은 평화를 원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세민의 모습
그는 고구려 연합에 속해 있던 고창국, 토번국, 골궐국 등을 차례로 굴복시키며 고구려를 고립시켰으며, 첩자를 보내어 고구려의 병력과 지리를 염탐했다. 그러는 한편 고구려에게 조금씩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전쟁 영웅의 기상이 사라진 탓인지, 백성들의 안정을 위해 전쟁만은 피하고 싶었던 탓인지 영류왕은 당나라의 요구를 수용했다.
- 당나라 하급 관리에 해당하는 '낭중급' 에게 고구려의 대대로(수상)이 굽신거림
- 당나라 사신이 영류왕에게 예를 갖추지 않음
- 당나라 하급 관료를 고구려 태자가 접대함
- 수나라와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경관'을 철거함
- 당나라 사신이 고구려 지도를 만들고 군사 기밀을 빼가는 것을 방조함
- 고구려 땅인 요동을 당나라가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기는 것에 반발하지 않음
이러한 영류왕의 정책은 결국 연합국들이 고구려가 아닌 당나라를 선택하게 만들었으며, 강경파였던 연개소문이 칼을 빼들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결국, 642년 연개소문은 "왕은 지금 나약해져서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며 쿠데타를 일으킨다.
연개소문의 모습
그리고 영류왕은 온몸이 난자 당하고, 그 시신은 구렁텅이에 던져졌다. 고구려 왕 중에 이처럼 비참하게 죽은 인물이 없을 정도였다.
분명 수나라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에 엄청난 활약을 했던 영류왕 고건무가 역사에서 그 빛나는 이름을 잃어버린 것은 아마도 이런 후기의 실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우선 당시 한반도 북방계 기마민족 연합의 우두머리였던 고구려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분열된 중국과의 전쟁으로 중국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형이였던 영양왕이 먼저 수나라를 공격할 수 있었던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통일된 중국과의 전쟁을 겪으면서 이른바 쪽수의 차이를 뼈저리게 실감한 것 역시 고건무였다. 고구려 군대의 용감함과 전술의 덕도 있었지만 수나라에게 이긴 것은 장마와 전염병이란 행운도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고건무는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고구려의 가장 대표적인 전술인 '청야전술'은 이름은 멋져 보이지만 우리 땅을 우리 손으로 불 지르고 독을 뿌리고 폐허로 만드는 이른 바 '너 죽고 나 죽자' 전술이다. 이겼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백성들이 짊어져야 했다. 그리고 신라와 백제 역시 신경써야 할 나라들이었기에 백제와 신라를 먼저 정벌하고 당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야겠다는 의도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영류왕도 충분히 이해할만한 이유들로 전쟁을 피하려 애썼던 것이다. 그러나 이세민은 평화를 결코 원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고구려를 압박했으며 결국, 이처럼 소극적인 모습에 실망한 북방 기마민족들이 고구려를 버리고 당나라의 편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거란은 1차 대당 전쟁 후 패하여 도망가는 당나라를 지원했으며, 2차 대당 전쟁 때에는 아예 당나라의 편에 서서 고구려를 몰아부치기도 했다.
물론 당시 강경파들의 주장처럼 만리장성을 넘어 당나라에 쳐들어 갔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북방 민족들을 잘 단속하며, 당나라에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적당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백제와 신라까지 공격이 아닌 연합을 이루었다면 더 전쟁 영웅다운 모습으로 고구려를 지켜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역사에서 을지문덕과 더불어 그 이름 석자 역시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