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했어야 할 이름들.1

1. 고건무(1)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접하게 된다. 특히, 왕이나 장군의 이름(그리고 연도)을 미친 듯이 외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가 그만큼 수많은 외침을 받았으며, 그들이 그때 이 외침을 물리쳤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억했어야 마땅할 사람들을 잊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엄청난 성과를 통해 나라를 지켜낸 인물들이나 세상에 자랑하고 싶을 정도의 업적을 보인 사람들임에도 다른 이의 그늘에 가려졌거나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름을 말하면 "누구? 우리나라에 그런 사람이 있었어?"란 대접을 받게된 사람들...

당분간 이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 영류왕 고건무


1) 수나라와 맞선 고구려

다른 이의 그늘에 가려졌던 대표적 인물이 바로 고건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 고건무의 업적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581년, 양건은 수나라를 세우고 문제로 등극한다. 그리고 589년 마침내 중국대륙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는데, 당시 북방계 기마민족들의 우두머리로 힘을 떨치던 고구려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물론,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에 비하자면 여전히 작은 소국일뿐이었기에 문제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고구려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661188f4901778ecdcf6336257a1cd196d590c4bd17f7f2147440e56c5ae95ff18e79369faeaef6c841ad85fdfed0ed1fca9e7d62629981ae199e94623108cbb1418079680242f726fe879ffd9c2abc0dffcbf3251efa4915b1cc14ebefa3cfaf8db251b9f24dd82fc221647.jpg

수나라 문제 (사진출처: 위키백과)


그래서 고구려 평원왕에게 다음과 같은 오만한 편지를 보내게 된다.


"비록 스스로 속국이라고 하면서도, 성의와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 그대의 나라가 비록 국토가 좁고 인구도 적지만, 이제 내가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그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을 것이므로, 결국은 다시 관리를 선택하여 그곳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단정히 하고 행동을 고쳐서 우리의 법도를 따른다면, 그때는 곧 나의 좋은 신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왜 힘을 들여 다른 인재를 보내겠는가? 요수(遼水)의 넓이가 장강(長江)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고구려 인구가 진나라와 비교하여 어떠한지를 왕은 말하여 보라. 내가 왕을 용서하려는 심정이 없고 왕의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기로 한다면, 한 사람의 장군에게 정벌을 명령해도 될 것이니, 어찌 큰 힘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간곡한 말로 타이르는 것은 왕이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바꾸도록 하려는 데에 있다."

- <삼국사기> 평원왕 32년(590년)


심약한 편이었던 평원왕은 문제에게 사죄하는 답장을 보내려했으나 결국 보내지 못한 채 그해 겨울 사망하고 만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고구려와 수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일촉즉발의 상황에 접어든다.

이때 새롭게 왕이 된 영양왕은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역을 선점하기 위해 고구려와 말갈의 군사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방을 공격(598년)했지만 수나라의 방어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소국이라 깔보던 고구려에게 선공을 당한 문제는 크게 분노하며 3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이것이 바로 수나라의 제1차 고구려 침입이다.

이때 수나라는 육로를 주공격 수단으로 삼고, 해로를 군량 및 보급품 수단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이런 수나라의 전술을 이용하여 육군에서는 밀렸으니 수군에서 수나라 수군을 궤멸시키며 보급선을 차단하였고, 때마침 시작된 장마로 인한 전염병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수나라 군사들은 대패하여 물러갔다.

비록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고구려로써는 수나라와 계속해서 전쟁을 치를 여력은 없었기에 사신을 보내어 요서 지방을 공격한 것에 대해 사과하였고, 문제 역시 이것을 받아들여 잠시나마 평화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2) 100만 대군의 침입

604년, 문제의 둘째 아들이었던 양광은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앉는데 이것이 바로 양제이다. 그는 급격한 개혁을 추구하며 폭압적인 정치를 하였으며 야망 역시 커서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켜 대제국을 건설하려 하였다. 역시 가장 걸림돌이라 생각되던 나라는 고구려였는데, 양제가 여러 차례 영양왕에게 수나라에 입조할 것과 엄청난 조공을 바치라는 강요를 했지만 고구려가 계속해서 대응을 피했기 때문이다.

수나라양제-1642490445912.jpg

수나라 양제 (사진출처: 위키백과)


그리고 마침내 612년, 양제는 113만(우군: 우문술 45만, 좌군: 우중문 45만, 자신이 이끄는 중군 26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 침략에 나서는데 보급지원을 위한 숫자까지 하면 300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수나라의 제2차 침입)

고구려군은 고작 30만 명 밖에 되지 않는 병력이었으나 요하를 틀어막고, 요동성을 강화하는 등 만만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수나라는 고구려군의 강력한 방어에 부딫혀 요하를 건너며 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나 결과적으로 요하를 건너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다시 청야전술을 펼쳐두고 요동성에서 3개월 넘게 수나라의 대군을 막아내는 고구려군의 모습에 질린 양제는 기동력이 뛰어난 정예군을 편성하여 평양성을 직접 함락하는 전술로 계획을 변경한다.

그러나 우문술과 우중문이 이끄는 30만 명의 별동대는 각자 먹을 100일치 식량을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했고, 결국 자신들의 짐을 줄이기 위해 식략과 장비 등을 몰래 파묻거나 버리는 짓을 벌였다. 이때,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적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적진에 들어가 회담을 하는 척하며, 수나라 군대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파악한다. 그리고 대담하게 이들을 더욱 평양성쪽으로 끌어들이는 유인작전을 펼친 뒤,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를 써서 우중문에게 보낸다.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귀신 같은 꾀는 천문을 구명하고 신묘한 셈은 지리에 통달했네. 전승의 공은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았으면 그치기를 바라오.)

- <삼국사기>


그리고 우문술에게는 사자를 보내 항복의 의사를 밝히는 척했다. 우문술은 자신들이 위험에 빠졌음을 직감하는 한편 을지문덕의 항복 의사로 인해 체면치례는 했다는 판단하에 조심스레 군대를 철수시킨다. 그리고 그들은 살수(청천강)에 도착했을 때 강물의 수량이 낮은 것을 보고 안심하며 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이때 미리 강의 상류에서 제방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던 고구려군은 제방을 무너뜨려 이들을 수장시키는데 성공한다. 고구려군은 엉망이 된 수나라 군대를 몰아쳐 대승을 거두게 되는데, 이때 살아서 돌아간 수나라 군사의 숫자가 3천 명이 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살수대첩-1642490501977.jpg

살수대첩 그림


3) 수나라의 멸망

이런 처참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듬 해인 613년, 양제는 다시 약 35만의 군대를 직접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한다. (수나라의 제3차 침입) 앞서의 교훈 덕분에 요하를 건넌 그는 요동성보다 높은 토성을 쌓고 그 위에서 화살로 물량 공세를 펼치게 된다. 이 작전은 효과를 보아 요동성에서도 마땅히 반격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에 발이 묶여 20여일 동안 발이 묶였고, 마침 수나라 본국에서 예부상서였던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며 많은 백성들이 이에 동조하자 급하게 철수하다가 뒤를 쫓아온 고구려 군에게 수많은 군사를 잃고 만다.

다음 해인 614년, 양제는 다시 고구려 침공을 선언하지만 이미 고구려와 싸울 마음이 사라진 대소신료들이 반대를 하며 전국 각지로 번지고 있던 반란을 먼저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제는 이들을 무력으로 협박하며 결국 고구려를 공격한다. (수나라의 제4차 침입) 그러자 이번에는 고구려에서 먼저 항복할테니 군사를 물려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양현감의 친구로 제2차 침입 때 고구려에 투항한 곡사정을 같이 묶어 보냈다. 고구려로서는 전쟁의 후유증도 심했지만, 무엇보다 수나라가 이미 내분에 휩싸일 것이 보였기에 적당히 양제의 자존심을 세워주며 전쟁을 피하려 한 것이다.

양제는 결국 군사를 돌려 수나라로 돌아가지만, 617년 마침내 대대적인 반란이 연이어 일어난다. 약 120여 건의 반란 사건 중에서도 양제의 이종사촌 형이었던 이연의 반란은 결국 성공하여, 장안을 점령하고 양제를 태상황으로 만들고 황태손이었던 양류를 황제에 앉히며 실질적으로 황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양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유배되어 가 있던 강도(양주)에서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하였으며, 마침내 618년, 우문술의 아들이었던 근위장 우문화급의 반란으로 죽임을 당한다.

결국, 수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무리한 정벌을 감행하다가 세워진지 38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 다음 이 시간에는 잊혀진 영웅, 고건무가 이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