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현재 대한민국 국군은 70% 이상이 육군일 정도로 육군에 치중되어 있으며 특히나 흔히 '포방부'라고 불릴 정도로 포병이 엄청나다. 다른 나라 미사일 보다 수준이 뛰어난 포들이 대거 배치되어 있어서 사실 대한민국 국군은 세계 138개국 중 군사력 6위(2021 글로벌파이어파워 보고)지만 육군만으로 따지면 5위인 일본은 물론 4위인 인도까지 넘어설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북한을 넘어 군사력 2위인 러시아나 3위인 중국으로 밀고 올라갈 것이 아닌 이상 3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한반도의 특성상 보다 집중해야 하는 것은 해군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해군을 만든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오늘 소개할 손원일 제독이다.
손원일 제독(출처: 대한민국 해군)
1909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손정도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손원일 제독은 중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 상하이에 들어와 있던 세계 열강들의 군함을 보고 우리나라에도 저런 군함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해군이 될 방법을 찾다가 중화민국 해군에 지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상선 사관이 되기로 결심하고, 1924년 남경 중앙대학교 항해학과를 나와 3등 항해사 자격증을 얻게 된다. 이후 1930년, 중국 해군의 해외 파병에 항해사로 동참하여 3년 동안 독일에서 근무하던 그는 1934년에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2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한다.
마침내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그는 주저없이 귀국길에 오른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의 유억겸 교장을 만나 해군 창설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일본에서 일등기관사로 활약하다가 귀국한 정긍모 등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모아 마침내 해사대를 결성했고, 미 군정과의 협의 하에 11월 '해병병단'을 창설하여 초대 단장에 취임한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해군의 시초였다.
물론 이 해병병단은 자립 능력이 없었기에 한 끼 식사도 해결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조선의 수군이 폐지된지 51년 만에 이 땅을 지킬 해군이 탄생했다는 큰 의미가 있다.
해방병단 창단 기념사진(출처: 해군)
이 해병병단은 1946년 해안 경비대로 이름을 바꾸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보의 수립과 함께 국군으로 편입된다. 이때 손원일은 대한민국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지만 당시 우리나라엔 군함이 한 척도 없었다.
사랑하는 조국이여, 우리에게 배를 주소서!
배가 없이는 바다에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 손원일 제독
결국, 손원일 제독은 미국과 협상을 통해 37척의 함정을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이 준 것들은 전투함이 아닌 비전투함이었고, 배를 건조하기 위해 '함정건조기금각충위원회'를 결성하여 자신의 월급을 보태고, 부인 역시 삯바느질로 돈을 벌어 그 자금에 보태었다. 이에 다른 해군 장병들이 앞다투어 참여했으며, 일반 국민과 대통령까지 성금을 모은 덕분에 6만 달러(12만 달러라고도 함)를 모아 직접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미국의회는 자신들의 퇴역 함정조차 팔지 않겠다고 결정했고, 결국 함포도 없이 민간에 중고로 팔렸던 함정을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손원일은 포기하지 않고, 이 중고 함정에 하와이에서 3인치 함포를 사서 붙이고, 괌에서 포탄 100발을 사서 싣고 진해에 도착한다. 이때가 6.25 전쟁이 일어나기 2달 전인 1950년 4월 10일이었다.
이 배는 영어명 'White Head', 번역하면 '백두'였기에 '백두산함'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6.25 전쟁 당시 북한군 600여 명을 태운 북한의 무장 수송선을 격침함으로써 대한민국 해군의 첫 해상 승리 기록을 세우게 된다.
하와이 진주만에서 3인치 포를 설치하는 백두산함 (출처 : 해군)
손원일 제독이 특히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을 때는 바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을 때이다. 영흥도와 덕적도를 탈환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밑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이 때에 불혹이 지난 나이에 직접 소총을 들고 해병대의 상륙을 지휘하는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서울 수복작전에도 직접 참가하여 국군 최고 지휘관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는 포고문을 직접 발표하기도 했다.
1953년, 군대를 전역한 뒤에도 그의 열정은 계속 되었다. 바로 국방장관의 자리에 앉은 그는 정전 협상에도 개입하였고, 국방부 기구를 대폭 개편하며 연합참모본부를 설치해 육해공군의 연계를 이끌었다.
또한,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여 외국으로부터 수많은 지원을 이끌어 내며 국방력 증가에 온 힘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국립서울현충원(당시 국군묘지관리소)를 설립한 것 역시 손원일이었으며, 국방대학을 건립한 것 역시 그의 업적이다.
초대서독대사 시절의 손원일(출처: 해군)
국방장관을 그만 둔 뒤, 1957년에는 초대 주서독공사로 취임했고, 불과 1년만에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키기도 한다. 3년 간의 외교관 시절을 보내면서도 국제원자력기구 정기 총회, 유엔해양법회의 등 다양한 국제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가하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였고, 유럽은 물론 카메룬, 모로코 등과 외교관계를 성립시키기도 했다.
대사직을 그만둔 1970년 이후에도 한국재향군인회, 아시아반공연맹, 한국홍보협회 등에서 활동하던 그는 지병인 신장병으로 인해 7년여의 투병 끝에 1980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나라 없는 서러움보다 더한 것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시는 내 조국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 손원일 제독의 유언 중
지금의 대한민국은 분명 수많은 이름없는 영웅들에 의해 건국되었고, 지켜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기억해야 할 이름은 분명히 있다. 대한민국 해군은 물론 국방력과 외교력 전방에 거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손원일 제독이야말로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이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