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유금필
고려 태조 왕건은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인물이며 영웅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정작 이 사람이 없었다면 왕건이 세운 고려는 초기에 무너졌을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오늘 이야기할 유금필이다.
그럼 이 유금필은 어떤 인물일까?
황해도 출신인 유금필은 원래 궁예의 밑에서 활약하던 장수였다. 918년 왕건의 혁명이 성공할 당시 왕건의 편에 서기는 했지만 1등 공신이 아닌 2등 공신에 머무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적극적이지는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가 세워진 후에는 왕건에게 충성을 바치며 자신의 능력을 내보이는 데, 가장 두드러졌던 것이 바로 골암진 전투였다. 발해가 힘을 일어가던 시기(920년 경) 발해 남부 지역의 여진족들이 고려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잦아지자 백제와의 힘겨루기 만으로도 힘겨웠던 왕건은 고민 끝에 유금필에게 이들을 제압하는 역할을 맡긴다. 이에 유금필은 3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골암에 도착하여 골암진에 성을 쌓고 그 주변의 여진족 추장 3백 여 명을 초청해 잔치를 벌인다. 그리고 그들이 취했을 때 그들을 모두 사로잡은 뒤 그 부락에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며 항복을 권하였고, 결국 그들은 항복을 하는데 여러 부락에서 귀순한 숫자가 1,500여 명, 포로로 잡혔다 돌아온 고려인이 3,0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역사서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북계(北界)의 골암진(鶻巖鎭)이 자주 북방 오랑캐에게 침략을 당하므로 여러 장수를 모아 말하기를,
"지금 남방의 흉도(兇徒 백제)가 멸망되지 않았고 북방 오랑캐가 걱정스러우니 짐(朕)이 자나 깨나 근심이 된다. 유금필(庾黔弼)을 보내어 방어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였다.
모두 "좋습니다." 하므로 드디어 유금필에게 명하니, 그날로 개정(開定) 군대 3천 명을 인솔하고 출발하여 골암진의 동산(東山)에 큰 성을 축성하고 그곳에 거처하며 지키게 하였다.
- 920년 3월
대광(大匡) 유금필(庾黔弼)이 북번(北蕃)의 추장 3백여 명을 소집하여 성대한 주연을 베풀어 주식을 많이 먹이고 그들이 추한 때를 포착하여 위협하니 추장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곧이어 사람들을 여러 부락에 파견하여 전달하기를 "이미 너희들의 추장이 복종했으니 너희들도 와서 복종하라."고 하였더니 여러 부락에서 서로 이끌고 와서 귀부(歸附)한 자가 1천 5백명이었으며, 포로되었던 고려 사람 3천여명을 돌려 보내었다. 이때로부터 북방이 평안하게 되었으므로 태조는 그에게 특별한 표창을 주었다.
- 923년 4월
그리고 바로 이때 받아들인 인원들을 바탕으로 그곳에서 기마군을 키우며 자신의 부대를 정비한 유금필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낸다. 925년에는 연산진(논산)에서 후백제의 길환 장군을 죽였고, 다시 임존군(예산)으로 진격해 백제군 3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또, 조물성(상주 혹은 안동)으로 견훤의 두 아들 양검과 금강이 이끄는 병력들이 공격해 왔을 때도 이들을 물리치고 성을 지켜냈다.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유금필(庾금弼)을 보내어 백제의 연산진(燕山鎭 충북 문의)을 쳐서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또 임존군(任存郡 충남 예산)을 쳐서 3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 925년 10월
928년에는 탕정군(온양)에 주둔 중이던 유금필은 백제가 3천의 군사로 청주를 공격하자 즉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 적병 300여 명을 죽이면서 승리를 거두었고, 929년에도 고창(안동)에서 백제군과 대치하던 중 적진으로 돌격해 큰 승리를 이끌었다.
태조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삼년성(三年城 충남 보은)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청주(靑州)로 후퇴하였는데 백제 장수 김훤(金萱), 애식(哀式), 한장(漢丈)등이 3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쫒아와 청주(靑州)를 침공하였다.
이때 유금필(庾금弼)은 명을 받들고 탕정군(湯井郡)에 성을 쌓고 있었는데, 하루는 유금필이 탕정군 남산(南山)에 올라가 앉아서 졸고 있었는데 꿈에 한 대인(大人)이 말하기를, “내일 서원(西原)에서 변란이 있을 것이니 빨리 가라”고 하였다.
유금필은 놀라 깬 후 그 길로 청주로 가서 적군과 싸워 격파하고 독기진(禿岐鎭)까지 추격하였는데 죽이고 부상당한 포로가 3백여 명이었다. 중원부(中原府)에 달려가서 태조를 보고 전투 정형을 자세히 보고하였더니 태조가 말하기를 “동수 싸움에서 신숭겸과 김락 두 명장이 전사하였으므로 국가를 위하여 깊이 근심하였더니 지금 그대의 말을 듣고 짐의 마음이 적이 안심되었다.” 라고 하였다.
- 928년 7월
견훤이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을 포위하였으므로 태조가 가서 이를 구원하려고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하니, 대상(大相) 공훤(公萱)과 홍유(洪儒)가 아뢰기를, “만약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죽령(竹嶺) 길로 돌아 올수 없게 될 것이니 빠져 나갈 길을 사전에 수리하여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유금필(庾금弼)은 아뢰기를, “신(臣)이 듣자옵건대, "무기는 흉악한 도구요, 전투는 위험한 일이라 하니, 죽자는 결심을 가지고 살려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은 연후에 비로소 승리할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 적군 앞에 나아가 싸워보지도 않고 먼저 패배할 것을 염려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의 3천여 명을 고스란히 적에게 주는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습니까. 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태조가 그 말에 따랐다.
유금필이 이에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분격(돌격)하여 적을 크게 대파하였다. 태조가 고창군에 들어가서 유금필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승전은 경(卿)의 힘이다”라고 하였다.
- 929년 12월
그러나 뛰어난 인물은 다른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기 마련이라 그를 모함하는 사람들에 의해 931년 곡도(백령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에 백제가 대우도(서산 부근)에 침략하자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아 배를 수리하고 이들의 공격을 막아낸다. 결국 왕건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유금필을 다시 불러들였다.
백제의 해군장(海軍將) 상애(尙哀) 등이 대우도(大牛島)를 공격하여 약탈하였으므로 태조가 대광(大匡) 만세(萬歲) 등을 보내어 이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니 태조가 이를 근심하였다. 유금필(庾금弼)이 곡도(鵠島)에서 서신을 올리기를,
“신이 비록 죄를 짓고 귀양 중에 있사오나 백제가 우리의 해변 고을을 침공했다는 말을 듣고 신이 이미 곡도와 포을도(包乙島)의 장정들을 선발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또 전함도 수리하여 이를 막으려고 하오니 성상께서는 근심하지 마시기를 원합니다”하였다.
태조가 서신을 보고 울면서 이르기를, “참소를 믿고 어진 사람을 쫓은 것은 짐의 불찰이다.” 하고, 사자를 보내어 그를 소환하고 위로하기를,
“경(卿)은 실상 죄가 없는데도 귀양간 것을 일찍이 원망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도울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 짐이 매우 부끄럽고 뉘우치는 바이다. 장차 자손들에게까지 상(賞)을 미치게하여 경의 충성과 절의에 보답하겠다” 하였다.
- 932년 10월
그의 활약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933년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에서는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는데 이마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왕건은 유금필를 급파한다. 그는 부하 80여 명과 함께 신라로 향하여 경주 사람들을 안심시켰고 돌아오는 길에 후백제의 신검 등을 만나 싸워 적장 7명을 사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유금필(庾금弼)이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에 임명되어 의주부(義州府)를 지키는데 태조가 사자를 보내어 이르기를,
“짐은 신라가 백제에게 침략 당함을 염려하여 일찌기 대광 능장(能丈), 영주(英周), 열궁(烈弓), 공희(公希)들을 파견하여 진수하게 하였는데, 백제 군대가 벌써 혜산성, 아불진(阿弗鎭) 등지에 이르러 사람과 재물을 약탈한다고 하니, 만약 신라의 국도(國都)에까지 침범될까 우려된다. 경이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고 하였다.
이에 유금필은 장사(壯士) 80명을 가려 뽑아 달려갔다. 사탄에 이르렀을 때 사졸(士卒)에게 말하기를, “만약 이 곳에서 적을 만난다면 나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다. 다만 너희들이 함께 칼날에 죽을 것이 염려되니 그대들은 각자가 살 도리를 잘 강구하라” 하니,
사졸들이 말하기를, “우리 무리들이 모두 죽었으면 죽었지 어찌 장군만 홀로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습니까” 하고, 서로 힘을 다하여 적을 치기로 맹세하였다.
사탄을 건너자 백제의 통군(統軍) 신검(神劒) 등과 맞딱뜨렸다. 유금필등이 싸우려 하였으나, 백제 군대는 유금필군의 대오가 정예로운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흩어져 도망쳤다.
유금필이 신라에 이르니, 늙은이나 어린이나 할 것 없이 성 밖에 나와서 맞이하여 절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에 대광(大匡)을 뵈올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대광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백제군에게 죽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금필이 그 곳에서 머물은 지 7일만에 돌아오는 길에 신검(神劒)을 자도(子道)에서 만나 싸워서 크게 이겨, 적장 금달(今達), 환궁(奐弓) 등 7명을 생포하였으며 적을 죽이고 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승전보고가 이르니, 태조가 몹시 놀라고 기뻐하면서, “나의 장군(我將軍)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같이 이길 수 있으랴” 하였다.
유금필이 들어와서 뵈오니 태조가 궁전에서 내려와 그를 맞이하여 손을 잡고 이르기를, “경(卿)의 공로는 옛날에도 또한 드물었던 것이다. 짐(朕)의 마음에 새기고 있으니 이를 잊는다고 이르지 말라” 하였다.
유금필이 사례하여 아뢰기를, “국난을 당하여 자기 일신을 생각지 않으며 위급에 직면하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신하된 자의 직분이거늘 성상(聖上)께서 어떻게 이같이 하십니까” 하니, 태조가 더욱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
- 933년 5월
934년에는 다시 운주에서 벌어진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태조가 친히 운주(運州 충남 홍성)를 정벌하려고 유금필을 우장군으로 임명하여 진군하니,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갑사(甲士) 5천 명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와서 말하기를
“양군이 서로 싸우면 양편이 다 온전하지 못할 형세이니 병졸이 살상(殺傷)을 많이 당할까 염려되니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기 국경(國境)을 보전하는것이 마땅하겠소”라고 하였으므로 태조가 여러 장수를 모아 의논하니
유금필(庾금弼)이 아뢰기를 “오늘의 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사오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신들이 적군을 격파하는 것만 보시고 근심하지 마소서” 하였다.
저 편에서 미처 진을 치기 전에 강한 기병(騎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적병 3천여 명의 목을 베고 ,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사(醫師) 훈겸(訓謙)과 용맹한 장수 상달(尙達), 최필(崔弼)을 사로잡으니 ,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城)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 934년 9월
유금필은 육상뿐만 아니라 해전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신라에서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감금하며 내분이 일어나자 왕건은 나주 땅을 되찾기 원했고 역시 유금필이 책임자가 되어 나주로 향하여 나주를 점령했다.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이르기를 , “나주(羅州)의 40여 군(郡)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오랫동안 풍화(風化)에 복종하였다. 일찍이 대상(大相) 견서(堅書), 권직(權直), 인일(仁壹) 등을 파견하여 안무하였는데, 근자에는 백제에게 침략되어 6년 동안이나 바닷길이 통하지 않았으니 누가 능히 나를 위하여 이 곳을 진무(鎭撫)하겠는가” 하니,
홍유(洪儒),박술희(朴述熙)등이 말하기를 “제가 비록 용맹하지는 못하나 장수의 한 사람으로 보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대체로 장수로 되려면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귀중하다”라고 하였다.
공훤(公萱), 대광 제궁(悌弓)등이 아뢰기를 “유금필이 적임자입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짐도 역시 이를 생각해 보았으나 그러나 요사이 신라로 가는 길이 막혔던 것을 유금필이 이를 통하게 하였으니 그의 노고(勞苦)를 생각하니 다시 명하기가 어렵다” 고 하였다.
유금필이 아뢰기를 , “신이 비록 아니 이미 노쇠(老衰)했사오나 이것은 국가의 큰 일이오니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태조가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 “경이 만약 명을 받든다면 어찌 이보다 더 기쁨이 있으랴” 하고, 유금필을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으로 임명하고 예성강(禮成江)까지 전송하고 어선(御船)을 주어 보내었다. 태조는 3일간 그대로 체류하면서 유금필이 바다에 나갈 때까지 기다려서 환궁하였다. 유금필이 나주(羅州)에 가서 경략(經略)하고 돌아오니, 태조가 또 예성강까지 행차하여 맞아 위로하였다.
- 935년 4월
이것을 계기로 금산사에 갇혀있던 견훤은 그곳을 탈출하여 나주로 도망쳐 고려에 귀순할 수 있었다. 신라의 경순왕 역시 그해 11월 나라를 왕건에게 바치며 항복했고,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이자 순천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박영규가 고려에 투항하며 고려는 백제 멸망의 기반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936년 벌어진 일리천 전투에서도 백제 멸망에 앞장서며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다.
일리천 전투에서 대상(大相) 유금필은 원윤(元尹) 관무(官茂),관헌(官憲)등을 부장으로 삼아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肋) 등 제번(諸蕃)의 강한 기병(騎兵) 9천 5백명을 거느리고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전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 936년 9월
이처럼 유금필은 고려가 힘들 때마다 왕건이 꺼내 든 히든 카드였고,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내었다. 고려가 건국되고 백제를 멸망시키기까지 위기의 순간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전세를 뒤집은 인물이 바로 유금필이다.
여진족을 굴복시켰을 때의 지략이나 수많은 전투에서 앞장서서 돌격했던 용맹함, 그리고 유배지에서도 나라를 위해 젊은이들을 모아 대적했던 충성심 등을 생각해 본다면 고려 시대에 이런 명장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오죽하면 왕건이 유언으로 "유금필의 후손이 죄를 짓는다고 해도 죄과를 논하지 말고 중용하라"는 말을 남겼을까? 실제로 손자 유공의가 여러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음에도 숙주방어사에 올랐으며, 또다른 후손인 유중경 역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사실 삼촌과 조카 관계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벼슬을 주어선 안되다는 여론이 일어났지만 유금필의 후손이라는 이유으로 벼슬을 받았을 정도이다.
고려의 태조는 왕건이지만 유금필이야말로 고려를 세우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유태사지묘(유금필 장군의 사당) -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