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척준경(2)
척준경의 활약으로 두 번이나 죽을 위기에서 살아난 윤관은 병력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 넓게 퍼져있던 고려군에게 소집령을 내린다. 이때 권지승선 왕자지는 공험진에서 자신의 군대를 거느리고 영주로 향하던 중 여진족 사헌이 이끄는 군대에 기습을 당하여 크게 패했고, 왕자지는 타고 있던 말까지 잃어 버리며 도망쳤다. 이 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가 그대로 사헌의 군대를 물리쳤고, 왕자지를 위해 적병의 말까지 빼앗아 선물했다.
결국 영주성으로 고려군이 모이자 여진족의 알새는 영주성 대신 웅주성을 공격했는데, 이때 웅주성을 지키던 최홍정은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에서 함께 있던 척준경에게 "포위를 뚫고 나가서 지원군을 불러와 주시오."란 요청을 한다. 결국 척준경은 해진 옷을 입고 성벽을 타고 내려와 단신으로 적진을 돌파하여 정주까지 가서 병력을 모으고, 통태진과 야등포, 길주 등을 거치며 여진족 잔당을 격파한 뒤 웅주성까지 와서 여진족이 포위하던 웅주성을 구해낸다.
척준경이 군사의 떨어진 옷을 입고 밤에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정주(定州)로 돌아와 군사를 정돈하여 통태진(通泰鎭)으로 가서,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吉州)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해 대패시키니 성 안 사람들이 감격해 울었다.
<고려사> 96권
이처럼 척준경의 종횡무진한 활약으로 말미암아 고려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9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여진족에게 돌려주어야 했지만...
사실 이러한 여진과의 화친을 주도했던 인물 역시 바로 척준경이었다. 그 스스로가 여진족이 두려워하는 용장이었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여 대금 사대를 찬성했던 것이다.
자신을 믿고 이끌어주던 윤관이나 오연총 등이 세상을 떠나면서 지지기반이 흔들린 척준경은 함께 대금 사대에 동조했던 이자겸의 밑으로 들어가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자겸은 인주 이씨 가문의 자손으로 인주 이씨는 고려 8대 왕인 현종 때부터 이허겸의 외손녀 셋을 왕후로 만들어낸 대표적인 외척 집안이었다. 이허겸의 손자였던 이자연 역시 문종에게 세 딸을 시집 보냈으며, 순종과 선종 역시 인주 이씨의 여인들을 왕후로 맞이했다. 당연히 선종의 아들 헌종에게까지 그 영향력이 닿았는데, 계림공(숙종)과의 권력 싸움에서 이자의(이자연의 손자)가 패하며 잠시 주춤하게 된다. 그러나 숙종의 아들 예종이 다시 이자겸의 딸을 왕비로 맞으며 외척 가문의 기세는 살아났다.
이 사이에서 다시 인종이 태어나 이자겸은 왕의 외할아버지가 되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셋째, 넷째 딸(인종에게는 이모)을 인종에게 시집을 보내어 왕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까지 된다. 이러한 권력자의 밑으로 들어간 척준경 역시 무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2품의 높은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사실 이자겸은 척준경의 무력을 필요로 했기에 자신의 아들과 척준경의 딸을 결혼시켜 사돈으로 엮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이자겸은 무서운 것이 없었다.
“자기 족속을 요직에 포열하고 관작을 팔았으며, 당인을 많이 심어 스스로 국공이 되고 예우를 왕태자와 같게 하며, 그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부르고 내외가 하례하는 글도 전(箋)이라 칭하게 하였다. 여러 아들이 다투어 제택(第宅)을 지어 가로에 잇닿았고, 권세가 더욱 성하게 됨에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하여져 사방에서 선물이 모여들어 썩어가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나 되었다. 남의 전토를 강탈하고, 그 종들을 내놓아 차마(車馬)를 노략하여 자기의 물건을 수송하니 주민들이 모두 수레를 부수고 소, 말을 팔아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고려사>
이자겸이 이처럼 막나가는 상황에 이르자 인종 역시 이자겸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궁궐에서 이자겸 일파를 죽이는데 이때, 척준경의 아들과 동생 척준신 등이 포함되었다.
이 사실은 척준경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척준경은 이자겸과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불까지 지르게 된다.
2월 신유일. 내시지후(內侍祗候) 김찬(金粲),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 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 ·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將軍) 고석(高碩) 등과 함께 이자겸과 척준경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도리어 이자겸과 척준경이 군사를 동원해 궁궐로 침범해 왔다.
임술일. 그들이 궁궐을 불태웠다.
계해일. 이자겸과 척준경이 왕을 협박해 남궁(南宮)으로 옮기게 한 다음, 안보린·최탁·권수·고석과 숙위하던 좌복야 홍관(洪灌) 등 17명을 죽였다. 이 외에도 죽은 군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고려사> 15권
인종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선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를 멀어지게 해야한다고 판단했다. 인종은 그들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척준경에게 밀사를 보내어 그를 회유하는데 성공한다. 척준경이 거칠고 단순한 면은 있으나 이자겸처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타입이 아니라 나름대로 충성심과 올곧은 면을 지닌 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자겸은 점차 불리해지는 상황을 느끼고 1126년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 간다. 그러나 이미 척준경은 인종을 호위하던 상태였고, 이자겸의 사병들을 뚫고 인종을 구해내며 이자겸의 반란을 제압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고려 최고의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무력은 있어도 정치적 기량이나 기반이 없었기에 대신들이 궁궐에 불을 지른 죄를 물어 탄핵하자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드리고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인종 역시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그의 고향인 곡산을 그의 유배지로 정해주었고, 척준경은 그곳에서 1144년 사망하게 된다. 만약 그가 자신을 따르는 무신들을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다면 분명 성공했겠지만 그는 담담하게 자신에 대한 처분을 받아 들인 것이다.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다시 감옥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여진족을 쓸어버리며 공을 세우고, 고려 최고의 권력자가 되자마자 귀양길에 오른 그의 다이나믹한 삶은 역사서에 기록된 그 자체이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모두 조선시대에 쓰인 것이기 때문에 척준경의 무력을 굳이 과장할 필요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척준경을 탄핵하는 데에 앞장 섰던 문관 정지상이 다음으로 고려의 권력을 잡았으며, 이후 고려 무신들의 대우는 알다시피 처참했기에 척준경의 활약을 줄였으면 줄였지 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기 때문에 삼국지 최강의 장수인 여포나 관우, 장비, 초한지에 등장하는 '역발산기개세'의 항우 등이 소설에서 보여준 것 이상의 위엄을 보였음에도 척준경이란 이름이 우리에게 낯설게 남은 것이라 생각된다. 이자겸과 엮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고려를 대표하는 무신이자 영웅으로 기억되었을 이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