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윤희순
요즘 젠더 갈등이 심각하다. 한남이니, 꼴페미니, 이대남이니... 서로를 물어 뜯기 바쁘다. 남녀 차별 문제에서 시작된 이 젠더 갈등의 바탕엔 사실 조선 시대의 유교가 깔려 있다. 고려 시대에만해도 우리나라의 남녀는 유산을 동등하게 물려받았으며, 제사를 지내는 것에도 차별이 없었다. 그러나 유학이 자리잡은 조선 중기 이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별이 생겨나고 깊어졌다. 그렇다고 모든 여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 시간에 소개할 여성 의병장 윤희순이다.
1860년 뿌리깊은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1876년 유제원과 결혼하여 춘천에 정착한다. 그러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다음 해에 단발령까지 시행되자 전국의 유생과 백성들은 이게 거세게 반발하며 의병 활동을 시작한다.
윤희순의 시아버지였던 유홍석도 춘천에서 사람들을 모아 의병 활동에 나섰는데, 윤희순 역시 집에서 찾아온 의병들에게 모아놓았던 곡식을 아낌없이 베풀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여자들을 불러 모아 "비록 여자라고 해도 나라를 구하는 일에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함께 의병들을 도울 것을 요청하며, 그런 내용의 <안사람 의병가>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의병들은 나라 찾기 힘쓰는데
우리들은 무얼 할까 의병들을 도와주세
내 집 없는 의병대들 뒷바라지 하여 보세
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 찾기 운동이요
왜놈들을 잡는 것이니
의복 버선 손질하여 만져 주세
의병들이 오시거든 따뜻하게 만져 주세
우리 조선 아낙네들도 나라 없이 어이 살며
힘을 모아 도와주세 만세 만세 만만세요 우리 의병 만세로다
<안사람 의병가>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자 의병 운동은 더욱 거세어졌고, 유홍석은 6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다. 윤희순 역시 마을의 여인 30여 명을 모아 여성의병 조직을 만들어 의병들의 먹거리와 세탁 등을 도왔으며, 의병 훈련에도 참가하고, 남장으로 분장한 뒤 정보 수집에 나서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시아버지와 남편이 먼저 중국 요령성 환인현으로 건너갔고, 윤희순은 1911년 남은 가산을 정리하여 합류하였다. 이때부터 시아버지와 남편이 의병들과 함께 끊임없이 투쟁하고 훈련하는 동안 윤희순은 마을 여자들을 이끌며 농사를 짓고, 산에서 나무를 하고, 때로는 구걸까지 하며 집안을 지켰을 뿐 아니라 군자금까지 모아 의병들을 도왔다.
또한, 당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해 노학당(老學堂)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덕분에 김경도, 박종수, 이정헌, 마덕창 등 5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기도 했지만, 3년 만인 1915년 일제에 의해 패쇄당했다.
하지만 이 사이에 윤희순은 큰 아픔을 겪게 되는데, 항일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시아버지 유홍석이 1913년에, 유홍석의 육촌아우이자 의병장이었던 유인석과 남편 유제원이 1915년 사망하였던 것이다.
윤희순은 환인현을 떠나 무순 포가둔으로 이전하였는데, 이곳에 현지의 중국인들에게 연대하여 항일 투쟁할 것을 꾸준히 요청하였다.
1920년, 홍범도, 김좌진 장군에게 대패한 일본군들이 간도참변을 일으키자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한국과 중국의 애국지사들을 모아 아들 유돈상을 중심으로 한중 연합조직인 '조선독립단'을 결성했는데, 여기에는 윤희순의 모든 일가 친척이 가입하여 '조선독립단 가족부대' 또는 '윤희순 가족부대'로 불렸다. 또한, 조선독립단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의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그 때 우리는 조선독립단 가족 부대를 무서워했습니다. 밤중에 산에서 총소리가 난 적도 있었습니다. 윤할머니는 이따금 우리 중국 사람을 찾아와서 같이 일본놈을 쳐부수자고 선전하였습니다.
당시 마을 주민의 인터뷰 내용 중
그러던 중 1932년,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철도 운수선을 습격했던 조선독립단의 '무순 작전'이 실패하였고, 일제는 이후 3000여 명이 넘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학살했다. 이 피해는 윤희순의 집에도 미쳐 일본군들에 의해 집이 불타게 되었다. 윤희순은 자신이 쓴 <일성록>에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불길 속에서 애 울음소리가 들려서
정신없이 포대기째 안고 나와보니
포대기도 아이도 모두 뜨겁더라
<일성록>
그러나 윤희순의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 1935년, 처갓집에 숨어있던 유돈상이 장인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한 달만에 감옥에서 나왔으나 죽음을 앞둔 상태였고, 결국 윤희순의 품에서 숨이 멎은 것이다.
어머니, 만날 나가서 독립운동 하려고 하시더니
이 꼴을 보려고 그러셨습니까.
좋은 세상은 더욱 멀어지고 갈수록 험렬하니
독립운동이 사람만 죽인 꼴이니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 당시 며느리가 외쳤다는 말
아들에 이어 며느리 마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그 강단 넘치던 윤희순 역시 삶의 의지를 포기하고 곡기를 끊은채 책을 써내려갔는데 그것이 <일성록>이다. 그리고 마침내 열하루째 되는 날인 1935년 8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윤희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82년 11월 9일 강원대학교에서 「해주윤씨의적비」를 항골마을에 건립하였으며, 정부는 1983년 8월 3일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장이자 8편의 의병가를 만들어 그들을 응원했던 윤희순은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유관순보다 어쩌면 더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이름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