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했어야 할 이름들.7

7.이태규 박사

그동안 소개해 드린 인물들이 무력(?)에 치중했던 듯하여 오늘은 지적 능력(?)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분을 소개할까한다.

사실 우리 역사에는 뛰어난 과학자들이 많았다. 고려의 최무선이나 조선의 장영실은 물론 우장춘 박사나, 이휘소 박사, 이왕호 박사 등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은 과학자들이 많다.

하지만 역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있는데 바로 이태규 박사이다.

다운로드 (5).jpg 이태규 박사

이태규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론화학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분이다. 그런데 왜 우리에겐 이렇게 낯선 이름일까?

이태규는 190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5살부터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한 그는 이른바 영재 소리를 들으며 열흘만에 천자문을 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서당이 문을 닫자 한한자였던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게 되었으며,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 덕분에 일제 치하에서도 예산보통학교와 경성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한다.

이후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간 그는 1학년때 언어 문제로 잠깐 성적이 안좋았지만 이후에는 1등을 놓친 적이 없어서 차석으로 졸업을 했다.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를 목표로 쿄토제국대학 이학부에 들어간다. 사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는 당당하게 도전하였고 결국 교토제국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1931년). -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 학위는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1926년 천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원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가 학위를 받자 교토제국대학은 그의 노력을 인정하여 그를 조교수로 임용한 것이다. 식민지의 2등 국민인 이태규가 일본인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태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더 많은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당시 가장 뛰어난 석학들이 모여있던 미국의 프리스턴대학으로 떠난 것이다. 당시 이곳에는 촉매학의 권위자인 테일러, 화학 분야의 헨리 아이링과 메이어, 수학 분야의 헤르만 바일,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 등이 재직 중이었다.

Eg0ZmRuUcAI0ryj.jpg 헨리 아이링

이곳에서 이론화학에 대해 공부하던 그는 헨리 아이링과 함께 1940년 <쌍극자 능률 계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는데 화학반응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양자역학을 도입한 것으로 큰 이슈를 얻는다. 문과생인 본인은 잘 이해가 안 가지만 현재까지도 반도체는 물론 양자컴퓨터의 기본 이론 중 하나가 된다고 하니 당시로써는 엄청난 이론적 발견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교토제국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던 중 해방 소식을 듣고 조국으로 돌아온다. 식민지였던 조국에서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그는 조선화학회(현 대한화학회)를 조직하고, 서울대학교를 설립하는 과정에도 참여하며 문리과대학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는 등 적극적인 조국의 재건을 도왔다. 그러나 이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투쟁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실망하여 다시 미국으로 향한다.

함께 연구했던 헨리 아이링 박사가 있던 유타대학에 들어간 그는 연구를 거듭하여 액체에 대하여 설명한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하는데, 당시까지 기체나 고체에 대한 설명이나 이론은 많았지만 그 중간 형태인 액체에 대한 설명을 부족했기 때문에 액체의 성질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해 낸 이론으로 주목을 받았다. 또한, '리-아이링 이론'으로 이태규 박사는 노벨화학상 후보에 거론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수송현상의 완화 원리'로 미국 화학협회의 산업 및 공업화학분과의 상패를 받기도 했다.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올 생각에 미국에서 시민권을 받는 것도 포기한 그는 1973년 한국과학원(카이스트의 전신)의 석좌교수로 귀국하였으며, 70이 넘은 나이에도 이후 20년 동안 70편의 논문을 남기며 우리나라 화학 발전에 큰 영향을 남겼다. 그리고 과학계 인물로는 처음으로 현충원에 안장(이후 3명이 더 안장되었다)되었다.

이처럼 뚜렷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이태규의 이름이 우리에게 낯선 이유는 다른 누군가의 그늘에 가려졌다거나 반역에 연류되어서는 아니다. 단지 역사의 거친 파도에 맞서지 않고 자신의 관심 분야인 화학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과학사학자로 불리는 송상용은 이태규를 "체제에 안주하는 보수주의자" 혹은 "친일은 아니어도 일본에 적개심도 가진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또 그 스스로도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당시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의 일탈 행위'로 치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일제치하에서 그들에게 강력하게 저항하였던 항일투쟁의 영웅들은 분명 위대한 혼과 정신력을 지닌 존경해 마땅한 인물들이다. 또한 군부의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분들도 영웅이며 감사한 분들이다. 그리고, 반대로 일제에 달라붙어 같은 민족을 억압했던 족속들이나 군부의 총칼 뒤에서 부귀영화를 누렸던 인물들은 비난의 돌을 맞아도 당연하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처럼 그냥 그 시대에 태어나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갔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소시민이 아닌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지녔던 이태규가 우리가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최소한 그가 매국노가 아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독재 군부의 앞잡이가 아니었다면 그가 이루어낸 업적은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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