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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독립, 따뜻한 동행

딸과 함께 한 지지향에서의 시간

by 호호아줌마

1박 2일 지지향 스테이


겨울 방학이 왔다. 학기가 끝나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간이라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예전에는 그들과의 일정으로 꽉 차 있던 방학이 점점 느슨해지고 있다.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고 회사를 다니면서 나의 방학도 예전과 달라지고 있다. 이번 방학은 대학생이 된 둘째와 함께 할 수 있어 더욱 귀중했다. 앞으로 이런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우면서도 그만큼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1박 2일 정도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가까운 파주에 있는 ‘지지향’을 가기로 했다. 지지향(紙之鄕)은 ‘종이의 고향’이라는 따뜻한 이름의 숙소이다. 파주는 집에서 차로 1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라 ‘누가 굳이 거기서 하루를 자고 오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멀리 가서 이것저것 보러 다니느라 분주한 일정을 보내고 오는 것보다 가까운 곳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으면서 하루를 보내고 싶은 로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지향은 파주 출판단지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같은 건물에 자리한 ‘지혜의 숲’이라는 도서관은 넓고 높은 공간에 빼곡히 꽂힌 책들로 가득해 그 자체로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지지향 안에는 ‘문발살롱’이라고 하는 카페형 도서관이 있는데 지혜의 숲만큼은 아니더라고 꽤 넓은 공간에 숙소 이용객에게는 24시간 개방되고 온도도 분위기도 한층 포근해 매력적이었다. 지지향 객실은 단순미를 추구하는 듯 깔끔한 목재 인테리어에 흰색 베드시트로 정돈된 침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TV 대신 책 다섯 권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디지털 프리’ 공간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딸과 나는 정오에 체크인하고 다음 날 오후 1시에 체크아웃할 수 있는 ‘25h 스테이’라는 패키지를 예약했다. 원래 금액보다 조금 비싸지만 카페 음료와 책을 구매하는 쿠폰이 포함되어 있어 부담이 충분히 상쇄된다고 생각했고 특히 여유롭게 하루를 충분히 만끽하고 싶었던 나의 요구에 맞았다. 체크인 시간에 맞춰 도착해 짐을 풀고 근처에서 점심을 간단히 하고 출판단지 동네를 드라이브했다. 겨울이어서 다소 삭막해 보이는 풍경이었으나 독특한 모습의 출판사 건물들도 있고 미술관도 모여있어 건축에 관심 있는 딸아이가 사진 찍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특히 미메시스 아트 뮤지움은 곡선의 외곽이 아름답고 내부 공간 역시 여백을 충분히 두고 곡선으로 이루어진 구성이 특이하고 아름다웠다.


KakaoTalk_20250411_142721818.png 미메시스 아트 뮤지움(홈페이지 사진)


새벽까지 가능한 책 읽기


본격적인 책 읽기는 저녁 이후부터 시작했다. 그때부터 새벽 1시가 가까운 시간까지 딸과 와인 한 병을 나눠마시며 책을 읽고 중간중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 9시가 넘어서부터는 웬일인지 숙소 사람들도 아무도 없어 그 넓은 ‘문발살롱’의 공간을 우리 개인 서재인양 온전히 누리면서 책에 그리고 딸과의 이야기에 마음껏 빠질 수 있었다. 내가 기대하고 바랬던 공간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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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숲과 문발살롱


자녀와의 관계 재설정


나이가 들면서 아이들은 성장하고 점차 부모의 둥지를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가족, 특히 자녀와의 관계를 새롭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자녀와의 관계는 중·노년기에 세대 간 연결을 가능하게 하고, 사회와의 접점을 유지하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족 내 역할 변화에 적응하고 소통 방식 역시 시대에 맞게 조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먼저 중요한 것은 자녀의 독립을 공허함이나 소외감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역할의 상실이 아니라 이제 나를 위한 새로운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시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예전부터 좋아했던 것들, 언젠가 해보고 싶었던 일들, 그리고 그려왔던 미래의 모습들을 떠올리고 실제 도전해 보며 이 시기를 나를 위한 기회로 삼아보자.


또한 부모로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지려 하기보다는 이제는 조언자나 멘토로서 곁을 지켜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때로는 멘토가 아니라 ‘멘티’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태도도 중요하다. 아이들은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이며 성장하고 있고,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우는 과정을 통해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더불어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자녀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기보다는 필요할 때 정서적·실질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녀는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책임지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부모는 ‘이래라저래라’가 아니라 선택과 결정을 믿고 응원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정말로 그들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나의 조언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가장 든든한 지지는 자녀가 언제든 필요할 때 곁에 있어줄 수 있는 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퇴직 후의 삶을 바라보는 우리와 사회 첫 발을 내딛으면서 독립을 준비해 가는 아이들, 가족 내 시간의 구성과 역할이 달라지는 이 시점에서 딸과 함께 지지향에서 보낸 하루는 앞으로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 소통 방식을 새롭게 맞춰가기 위한 의미 있는 연습이었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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