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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억새 이야기

by 호호아줌마 Mar 03. 2025

어느 늦가을 주말, 나는 포천 산정호수 근처에 있는 억새밭을 다녀왔다. 산정호수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게 큰아이가 유모차를 타고 갔었던 때였으니 벌써 20년도 넘었나 싶다.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지나간다는 생각에 놀라웠다. 그때만 해도 산정호수 근처에는 버스를 대여해 와서 음악을 틀고 노래와 춤을 즐기던 나이 지긋한 분들이 많았다. 당시 놀이문화라는 것이 거의 없었으니 그런 장면이 낯설지 않은 시절이었다. 호수 주변을 드라이브하며 콧바람을 쐬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번 억새밭 여행은 시작이 쉽지 않았다. 대중교통이 가능하다고 해서 버스를 타기로 했는데 서울에서 출발하는 포천행 광역버스가 4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는 사실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또 포천에 도착해서는 산정호수까지 가는 광역버스에 빈자리가 없어 그냥 보내야 했던 순간은 당혹스러웠다.  25분을 더 기다려야 오는 다음 버스 역시 핸드폰 앱에서 좌석이 없다고 나오니 더욱 그러했다. 결국 택시를 탔고 4만 2천 원이라는 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산정호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택시라도 타고 간 것이 다행이었지만 비싼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된 셈이었다.


산정호수 상동정류장에서 억새밭까지는 편도로 약 1시간 10분이 걸렸다. 예상보다 가파른 등산길이 많았지만 빨갛고 노란 단풍나무들과 등룡폭포가 볼거리를 제공해 등산의 즐거움을 더했다. 마지막에 다다라서 만난 가파른 바위길은 최고의 난이도였다. 억새밭을 보려면 이 정도는 넘어가야지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린아이들을 동반한 젊은 부부들도 눈에 많이 띄고 단풍보다 더 화려한 색깔의 등산복을 입은 동호회 그룹들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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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단풍나무와 억새밭 가는 길


드디어 억새밭에 도착하니 명성산 자락과 어우러져 경이로운 장관이 펼쳐졌다. 바람에 흩날리면서도 꺾이지 않는 억새의 강인함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다녀와서 찾아본 억새꽃의 꽃말이 우아(grace), 인내(endurance), 생존(survival)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더욱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어려움 속에서 섬세한 외모와 탄력성을 유지하는 우아함, 부러지지 않고 자유롭게 흩날리는 모습은 흡사 우리 삶에서 인내를 통해 도전하고 승리하는 생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억새밭 사이로 이어진 데크와 벤치도 여행자들이 앉아 쉴 수 있도록 잘 마련되어 있어 사가지고 간 김밥을 먹으며 충분히 감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멀리 보이는 울긋불긋한 단풍산을 배경으로 가까이는 은색 억새꽃의 살랑 살랑이는 모습이 대비되면서 완벽하게 어울려지는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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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산 억새밭


억새꽃의 영어 명칭인 ‘Silver Grass’는 그 은빛 외모에서 유래했겠지만 그래서 노년기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나라 농촌진흥청의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 나와있는 억새꽃의 꽃말이 '은퇴'로 쓰여있는 것도 이런 이유인 듯싶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나이 드는 모습이 바로 억새꽃의 부드러우면서 강인한 모습을 닮아가는 것 같다. 은빛의 억새는 단순히 외형적 아름다움을 넘어 바람에 흔들리지만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서 더욱 단단하게 뿌리를 내려간다. 젊을 때는 단단하기에 쉽게 꺾이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며 우리는 부드러움 속에서 강인함과 인내를 배워간다. 우리의 인생이 억새를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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