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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라이프

서까래 같은 삶

by 호호아줌마


은퇴 후 삶에 대한 상상은 이제 내 일상의 일부가 되고 있다. 기대와 설렘으로 들뜨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두려움과 긴장감이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알고 있다. 부정적인 기대는 오히려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해치는 독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긍정적인 기대’를 선택하며 불확실한 미래이지만 따뜻한 그림으로 그려보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퇴직 후 삶, 한옥의 고요한 시간 속에서 답을 찾다║


한옥에 관심이 많은 딸 덕분에 한옥스테이를 자주 찾는다. 이번에는 경북 봉화에 있는 성암재였다. 지난번 찾았던 강릉의 깔끔하게 조성된 관광형 한옥과 달리, 성암재는 실제로 오랜 기간 사람이 살고, 숨 쉬고, 시간을 쌓아온 집이었다.


1915년 금강송으로 지어진 이 한옥은 독립유공자 강필 선생의 아들 성암 강승원의 가옥으로(대한민국 구석구석, korea.visitkorea.or.kr), 현재는 그의 손자 부부가 퇴직 후 귀향해 숙소로 운영하고 있다. 현재의 주인은 오랜 외국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2012년 퇴직 후 귀향해, 이 고택에 머물려 손수 고치고 가꾸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랜 역사와 인생의 이력이 겹겹이 배어있는 이곳은 조용한 산자락 아래, 정갈한 정원과 ‘ㅁ’ 자형 안마당, 곳곳에 배어있는 옛 시간의 결이 깊고 따뜻했다.


서울에서 차로 3시간, 우리는 1박 2일 일정으로 봉화 성암재를 향했다. 가는 길에 먼저 들른 청량산의 청량사백두대간수목원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깊은 산중에서 만난 청량사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고, 수목원은 전 세계 두 번째로 큰 규모로 알려진 만큼 다양한 생물자원을 볼 수 있는 자연의 전시장이었다(이 두 곳은 봉화를 찾는다면 꼭 함께 들러보기를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KakaoTalk_20250806_103413623.jpg 청량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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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수목원


내비게이션을 따라 숙소를 향하는 길은 조금 헷갈렸다. ‘정말 여기 맞나?’싶은 순간을 거쳐 주인분과 통화 후 골목 안으로 들어가서야 고즈넉한 기운을 품을 고택이 주차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사전 메시지로 방문 시간을 확인해 주시고, 청량사에 오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주차장 안내까지 해주신 주인 남편분이 마중을 나오셨다. 그분의 첫인상은 이 고택처럼 단정하고 조용했으며, 무엇보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당한 정중함’이 오히려 큰 환대로 느껴졌다.


그분의 안내를 따라 가옥 전체를 둘러보며 우리가 머물 공간도 소개받았다. 늦게 예약한 탓에 남아있던 작은 사랑방이었지만 충분히 아늑하고 좋았다. 샤워실과 화장실은 실내 공간과 분리되어 있었고, 전통의 구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한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정원은 한국 전통 정원의 정갈한 아름다움 속에 어딘지 모르게 유럽 시골마을을 떠오르게 하는 풍경이 어우러져, 이질적인 조화가 오히려 자연스럽고 편안히 다가왔다. 가옥의 역사와 주변 맛집들에 대한 안내를 받은 후, 대접해 주신 시원한 옥수수차를 마시고 있으니 하루 트레킹으로 지친 몸이 부드럽게 풀리는 듯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한옥의 실루엣이 어우러진 풍경을 보며 ‘맞아! 이게 바로 우리 한옥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제된 것 같으면서도 투박하고, 시간이 멈춘 듯하면서도 생생히 살아있는 공간, 바로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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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재


정성으로 채워가는 삶


다음날 아침엔 주인 부부가 나오셔서 간단한 아침을 제공해 주셨다. 따로 주문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삶은 감자와 토마토, 자두를 직접 내린 커피와 함께 내어주셨다. 특히 커피는 마루에 걸려있었던 바리스타 자격증의 소지자인 남편분이 만드셨다고 해서 그런지 향과 풍미가 깊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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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퇴직 전 두 분의 생활과 퇴직 후 내려와서 시작한 이야기, 전통 가옥이다 보니 수리하고 가꾸는 노고와 그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 등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가옥이 오래되다 보니 집 보수하고 정원을 가꾸는데 많은 정성을 들여야 되는데, 그중에서 지붕 아래 서까래를 가리키면서 남편분이 말씀하신 게 인상적이었다. “저건 백 년이 훨씬 넘은 나무인데요, 아직도 튼튼합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옛날엔 나무를 그냥 안 썼어요. 몇 년 동안 소금물에 담갔다가 말렸다가, 그걸 반복해야 나무가 뒤틀리지 않고 오래가거든요." 침묵과 인내를 가지고 정성을 들여 이 집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신 두 분의 모습이 이 서까래 같아 보였다.


젊은 시절, 우리는 소속되어 있는 조직, 보살펴야 되는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진 역할과 타인의 시간에 맞춰 살아왔다. 퇴직 후 이런 일상이 없어지면서 스스로의 삶의 '다시 설계'해야 한다. 스스로의 시간을 구조화하고 어떻게 채워나갈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성암재의 주인 부부는 매일매일의 삶을 정성으로 천천히, 그리고 분명하게 채워가고 있었다. 정원을 돌보면서,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서까래 먼지를 닦아내면서 자연스럽게 구조화된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한옥의 오래된 서까래처럼, 두 분의 모습도 천천히 그렇지만 정확하게 시간을 통과하며 삶을 단단하게 붙들어가고 있는 듯했다.


║서까래 같은


우리는 은퇴 후의 삶을 준비하며 종종 ‘무엇을 할까?’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데 집중한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살아갈까?’에 더 많은 질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


서까래처럼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들이고

마음을 들이는 삶.


그 속도가 느릴지라도,

그 삶은 반드시 단단하고 오래갈 것이다.


정성으로 일구는 일상, 그것이 은퇴 후 삶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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