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잃어버리고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감정을 ‘불망 감’이라고 한다. 그런 상태가 되기 전 전조증상이 있는 데, 바로 ‘쓸데없는 짓, 장난이 끊긴다’라고 한다. <철들면 죽는다>고 김경일 교수님은 장난기 많은 얼굴로 얘기하셨다”
순간,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가끔 아버지께서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엄마에게 농담을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를 잘 받아주지 않았다. “또, 시답잖은 얘길 하고 있네..” 인상을 찌푸리셨다. 최근 몇 년간 아버지의 장난기가 부쩍 줄어든 것이 마음에 걸린다.
“엄마. 아빠 농담도 받아주고 그래요” “어머니가 받아주시면 아버지가 좋아하시더라..” 어머니에게 안부전화를 하던 중에 슬쩍 얘기해보았다.
“아휴.. 몰라” 어머니도 알고 계시는 데 그게 잘 안되시는 거다.
이번 겨울, 부모님은 30년 만에 이사를 하셨다. 오래된 상가 2층에서 거주하시다가 작은 평수의 새 아파트로 옮기셨다. 부모님은 이사 전 집 정리를 하느라 몇 주동안 고생하셨다. 특히,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던 것들을 싹 끌어내 보니 비닐봉지에 담긴 묵은 음식 덩어리가 거실 바닥을 다 차지하고도 남았다. 낡은 가구와 가전제품도 모두 폐기 처분했다.
새집에 소파를 새로 들여오고 시스템 에어컨과 새 냉장고도 설치했다. 어머니는 냉동실이 너무 작다고 투덜대시고는 가져온 음식재료들을 다시 꽉 쟁여놓으신다.
“엄마, 아직 20년은 더 드실 수 있겠다”
“이 녀석이!”
이삿짐 직원들은 짐을 옮겨만 두고 갔다. 이제부터 어머니와 누나가 직접 정리해야 한다. 우리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들을 바라보면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엄마, 이런 날은 짜장면 시켜먹는 건데..”
“이렇게 먹을 거 많은 데, 뭐하러 시켜먹니. 고기 든든히 먹어”
내가 돌아온 후로도 어머니는 한참을 정리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평생 장사하시느라 고생만 하고 아픈 추억이 있는 환경을 벗어나셔서 다행이다.
이제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계신 것 같다. 어머니는 다리가 많이 안 좋아서 걸을 때 절룩거리신다. 아버지도 어머니가 계단을 불편해하셔서 아파트로 이사 가기로 결심하셨다고 한다. 대신 아버지께서는 담배 피우는 것이 불편하다고 하신다. 이사한 세대가 1층이라 아버지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다.
어머니는 할 말 다하시는 스타일이시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인심 좋으신데,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시면 꼭 얘기해야 직성이 풀리신다. 아버지는 그걸 받아주시면서 참으셨다. 그러다가 가끔 술을 많이 드시면 폭발하신다. 어릴 적에는 가재도구를 부수고 밤새 욕을 하셨다. 한밤중에 이웃 아버지 친구분께 도움을 요청하러 많이 다녔다.
지금은 기력이 쇄하셔서 덜 하시지만 가끔 술주정을 하시는 거 같다. 아버지 보기에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져주신 적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술의 힘을 빌려야 어머니를 이길 수 있다. 50년 넘게 같은 패턴이다. 서로 받아주면 해소될 텐데. 일방이 받아주고 있는 데 상대방은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탈이 난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손뼉을 쳐도 양손이 맞아야 소리가 나지..”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모진 세월을 견뎌 내느라, 마음에 여유가 없다. 어머니도 그것을 아셔서 불쌍하게 생각하신다. 아버지도 어머니가 안살림에 장사까지 하며 10원짜리 모아서 자식들 대학까지 보내신 걸 알기에 고맙게 생각하신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 표현을 잘 못하신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연탄가게를 했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리어카’에 연탄 천장, 오백장을 실어서 집집마다 배달했던 기억이 난다. 연탄가게를 끝내고 다음에 쌀가게와 조그만 슈퍼를 여셨다. 그리고 우리 집 끝에 붙어있던 연탄창고를 개조해서 이제 청소년이 되어버린 아들의 방을 만들어 주셨다.
요즘 부쩍 부모님 기력이 쇠약해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복용하는 약의 양이 점점 늘어난다. 작은 일에도 신경 쓰는 것을 힘들어하신다. 아버지는 인지능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어서 뇌세포 활성화에 도움 되는 약도 드신다. 베개를 갖다 대면 바로 주무셨었는데 이제는 불면증도 생겨서 가끔 수면제를 드신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어머니가 깜박깜박한다고 걱정이시다.
이번에 어머니께서 은행에서 필요한 돈을 찾으셨는 데 돌아와서 보니 금액이 맞지 않는 일이 있었다. 은행에 찾아가셔 확인하셨지만 은행 직원은 분명히 돈을 제대로 넘겼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직접 쓰신 장표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번에 내가 온 김에 다시 한번 나랑 은행에 가보자고 했다.
어머니께서는 돈을 잃어버린 것보다, 본인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 바보가 된 거 같아 마음이 불편하셨다고 한다. 나는 직접 은행 보안요원과 함께 CCTV를 확인했다. 영상에서 직원이 돈을 건넸고 어머니는 윗옷 안주머니와 가방에 나누어 넣는 것이 보였다.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며칠이 지난 후, 어머니가 전화를 주셨다. 모자란 돈을 어디에 썼는지 기어코 기억해 내셨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암기력이 좋으셨다. 전화번호나 외상 받을 금액을 컴퓨터처럼 잘 기억하셨다. 어머니의 비상했던 머리도 이제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두 분은 여전히 가끔 싸우시는 거 같다. 내가 전화드리면 나에게 한탄하신다. 이제 내가 양쪽을 달래 드려야 한다. 아버지는 “부모가 아직 움직일만하니 자식에게 거꾸로 효도하는 거다” 하신다. 맞는 말씀이다. 이제 아버지는 사소한 일에도 머리 아파하신다. 이해가 된다, 나도 벌써 사소한 일이 많으면 집중하기가 어렵고 성가시다!
“아니, 뭐 그렇게 걱정할 게 많아요” 어머니는 그래도 긍정적이시다. 아버지가 농을 하시고 어머니는 “치~”하시면서도 슬쩍 받아주시는 모습을 자주 보고 싶다. 두 분이 이제 서로 의지하시면서 잘 지내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건강도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으니 두 분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의지하고 계신다.
“부부는 지게 작대기야! 작대기 하나가 넘어지면 둘 다 같이 넘어지는 거야!” 아버지께서 자주 하시는 이야기. 맞는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부부밖에 없다!
<아버지, 어머니 이제 좋은 환경에서 두 분이 지금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더 많이 웃으시면서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