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초등학생 때는 매일 아무 생각 없이 놀았단다. 다치거나 즐거웠던 이야기를 빼고 나니 어린 마음에 강렬했던 경험만이 몇 가지 생각이 난다. 다음은 아빠의 어릴 적 기억 조각들을 모아 본 이야기란다.
초딩 1년. 이게 유일한 기억이다. 내가 울면서 집으로 오는 장면이 보인다. 이 기억은 마치 내가 제삼자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기억이 난다. 학교를 다 마치지 않았는 데, 선생님이 가라고 했었던 것 같다. 팬티에는 커다란 x덩어리를 달고 엉거주춤한 걸음걸이였었다. 나는 수업시간에 x 마려웠지만, 손을 들어 화장실 가고 싶다고 말을 못 하는 아이였나 보다. 바짓가랑이 사이로 묵직한 것이 출렁거렸던 느낌이 생각난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서 30분 거리였다. 그때 내가 얼마나 창피했고 많이 울었을까?
초딩3년. 봄 소풍을 갔던 기억이 난다. 장소는 동구릉. 학교가 인근에 있어서 매년 빠지지 않고 그곳이었다. 학년마다 9개의 능을 돌아가면서 장소를 바꾸었다.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맛있게 먹고는 ‘보물찾기’를 했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진 찍기! 사진사 한분이 한자리에 있고 각 반마다 대기하고 있다가 똑같은 자세로 같은 배경으로 찍었다. 앨범에 그대로 나와 있다. 담임선생님 코는 유난히 빨갛고 컸다. 흑백사진이라 어쉽다!
초딩4년. 수업 중에 떠들다가 교실 앞으로 불러 나가서 혼났던 기억. 선생님은 아이들 앞에서 바지를 벗으라고 했다. (칠판을 보고 돌아서서..) 나는 창피해서 울었다. 선생님은 긴자로 엉덩이를 몇 차례 때렸다. 그 선생님은 총각이었는 데, 마침 우리 집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 집은 조금만 슈퍼를 하고 있었고, 가끔 저녁에 선생님이 오시면 엄마는 만둣국을 끓여서 대접해 주셨다. 선생님은 아버지와 소주를 드시고 취하신 후에야 댁에 돌아가셨다.
초딩5년. 나는 인근 서울로 전학을 갔다. 주소를 친척 집으로 옮긴 일종의 ‘위장전입’이었다. 반 친구 중 짓궂은 녀석이 하굣길에 나를 따라왔다. 우리 집을 확인하려고 했다. 나는 녀석을 따돌리느라 힘들었다. 그때는 남녀가 짝꿍이었다. 가끔 학기 중에 짝을 바꾸었다. 이번에 바뀐 옆에 짝이 내 허벅지를 자꾸 쳐다본다. 이 친구는 덩치가 커서 좀 무서웠다.
초딩6년. 미술 선생님이 담임이셨다. 좋은 분이었다. 어머니는 ‘녹색어머니’ 회원으로 아침일찍부터 교차로에 서 계셨다.(어머니.. 너에게는 할머니는. 아직도 이때 참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부반장이었다. 엄마와 선생님은 내가 좀 더 씩씩한 친구가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처음으로 이성에 관심을 가졌다. 내가 좋아했던 친구는 여자 부반장이었다. 근데 모두 그 친구를 좋아했다. 인기가 제일 많은 아이가 반장, 부반장이었다. 나 빼고… 나는 그 아이 앞에서 가끔 얼굴이 빨개졌던 것 같다.
그해 나는 처음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봤다. ‘미도파 제기점’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졸라서 프로야구 (광주) 해태 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이 되었다. 그때 미도파백화점에서 회원 모집을 했었다. 빨간색 비닐 점퍼, 빨간 모자, 사인이 인쇄된 야구공 그리고 선물 포장한 커다란 상자를 하나 받았다. 집에 와서 포장지를 뜯어보니 ‘해태 종합 선물세트’였다. 어머니는 실망하셨다. ‘애게… 이거 우리 가게에도 있는 거잖아!’ 하시고는 가게 선반 맨 위를 가리키셨다. 그곳에는 똑같은 ‘선물세트’가 진열되어 있었다. 마침 TV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이 화면에 나왔다. 정각 9시 인가보다… 나는 그날 밤, 야구공을 손에 쥐고 빨간색 비닐 점퍼를 입고 잤다.
보너스 기억… 중학 2년.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반장 시켰다 (왜 나는 맨날 부반장이냐!)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학교를 갔었다. 선생님은 내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자주 ‘가정방문’을 오셨다. 아버지, 어머니는 선생님께 술상을 내오셨다. 그리고 선생님이 댁으로 가실 때는 ‘하얀 봉투’를 내미셨다.
엄마, 아빠! 없는 살림에 저희들 키우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서러운 일도 많으셨을 텐데, 저희 버리지 않아서 정말 감사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