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0대 초반의 아저씨. 아내와 아들 하나가 있다. 나는 잘 때 침대 베개맡에 꼭 두고 자는 인형이 있다. 이름을 “피피” (pink pig)라고 지었다. 분홍색 돼지인형이다. 어떤 점이 끌렸을까? 첫인상이 좋았다. 디자인도 독특했다. 돼지인데 체형이 납작했다.(두께가 얇다)
몇 년 전,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이 녀석을 발견했다. 아내에게 귓속말로 ‘나 이 인형을 갖고 싶어. 사도 돼?’라고 허락을 구했다. 아내는 웃으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계산대 위 상품 더미 속에 슬쩍 그 인형을 끼워 넣었다. 누가 보면 ‘중년의 남자가 인형을 산다? 늦둥이 딸이 있나 보네..’라고 생각하기를 바랐다. 아내와 아들이 장바구니에 물건을 넣는 동안 나는 조마조마하면서 계산대 앞에 섰다. 다행히 계산원은 인형이 누구 것인지 관심이 없었다. 그 후, 이 핑크 돼지인형은 나의 최애 인형이 되었다.
아내는 내가 좀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중매로 만나 사귀기 시작할 때, 그런 모습이 싫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4개월 만에 결혼해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가 보다. 나는 잠자리에 들 때, 나와 아내 사이에 핑크 돼지 인형을 두는 데, 가끔 아내가 침대 구석으로 던져 버린다. 좀 토라지면 그렇다. 그러면 나는 슬쩍 녀석을 끌고 와서 반대편 베개 쪽에 두고 잠을 청한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이 손이 오그라지고 계실 거 같다. 이쯤에서 50대 남자가 인형을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해야겠다. 나는 두 명의 누나와 자랐다. 누나들은 나를 무척 아껴주었다. 작은 누이는 지금까지도 나를 정말 아껴준다. 사랑이 넘치는 성품이다. 유아특수 교사로 일하고 있으니 이해가 될 거다. 누나들은 어린 나와 동네 동생들을 데리고 놀아주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노래도 부르고, 실을 가지고 놀거나, 소꿉놀이, 인형을 가지고 이런저런 상황극을 하면서 놀았다.
나는 가끔 침대에서 혼자서 핑크돼지를 가지고 논다. 내 생김새, 이미지와 너무 다른 이런 얘기까지 하는 것이 괜찮을까… 살짝 걱정된다. 팬트리 창고에는 어릴 적 누나와 가지고 놀던 토끼 인형이 있다. 40년도 더 된 빨간색 눈의 토끼 인형인데, (위아래로 흔들면 소리가 나던 인형, 기억하시는 분은 중년의 나이일 거다) 이 인형은 큰 누나 생각이 나게 한다. 큰 누나의 유품으로 가지고 있다. 누나는 20여 년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30대 모습 그대로 아직 눈에 선하다. 모든 유품을 정리하고 불태웠던 그날. 내 눈에 이 토끼 인형이 들어왔다. 누이와의 추억이 담긴 이 인형을 몰래 챙겼다.
이제는 시간이 지나서 많이 담담해졌다. 하지만 11월이 되면 우리 가족은 각자 우울해진다. 누나 얘기를 웬만해서 하지 않는다. 이제는 누군가가 내게 형제관계를 물어보면, 누나와 나 둘이라고 대답한다. 언제부턴가 큰누나가 세상에 없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나 보다. 큰 누나는 하늘나라에서 언제나 우리 가족을 살펴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버지의 꿈에서도 작은 누나의 꿈에서도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나서 잘 있다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나도 일본에 파견 갔을 때, 꿈에서 어렴풋이 누나를 본 적이 있다.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해주었다. 내가 아주 찰나의 교통사고 위험에 빠졌을 때 기적처럼 나를 구해주었다고 믿고 있다.
20여 년 전 ‘하늘은 착한 사람을 먼저 데리고 간데’라고 위로해 주었던 후배가 고마웠다. 그 후배도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었다. 인형이 가문의 유품이 될지도 모르겠다. 자녀, 손자, 손녀들이 핑크돼지 인형을 보면서 아버지, 할아버지를 추억하게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