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송화는 어디서나 잘 자라는 꽃이다. 이십여 년 채송화를 키운다. 태양이 뜨거운 여름 한낮에 만개하는 엷은 꽃잎이 좋다. 특별히 거름을 주지 않아도 흙이 마르지 않으면 화분이 넘치도록 세를 불린다.
장맛비 한 차례 지난 후 채송화가 전 같지 않다. 꽃송이가 작년보다 적은 것이 세가 죽은 듯 보인다. 가까이 살피니 개미가 산을 이루고 있다. 진딧물 농사로 부지런한 개미들 등살에 채송화가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다. 땅에 해가 없다는 친환경제제를 사다 뿌렸지만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다. 결국 진딧물과 개미 전용 살충제를 뿌린다.
채송화를 살폈다. 뽑아낼 것과 그대로 두어도 될 것들이 구분되었다. 누렇게 말라버린 줄기를 뽑으니 엉킨 뿌리들은 아직 제 색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희망이 끝난 채송화였다. 일곱 개의 화분 중 가장 기대했던 화분이 제일 크게 무너졌다. 한창 싹을 내던 봄에 개미가 자주 눈에 띄었지만, 마당 옆에 둔 화분이라 그러려니 했다. 이십여 년 끊임없이 싹을 내고 꽃을 피우던 채송화가 아니던가. 노파심이라며 지나쳤던 자리에 푸르렀을 여름이 못내 안타까웠다.
새벽 긴 출장길에 나서는 남편을 배웅한다. 자동차 앞 유리에 붙인 노란 세월호 리본이 아직 선명하다.
“이젠 떼지?”
한마디 건넸다.
“아직 색이 그대 론데, 그냥 둘래.”
내심 끄덕이는 데 형체 모를 불안이 잡힌다. 괜스레 말로 나올까 저어하여 골목을 벗어나도록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지난봄에도 사고가 있었다. 졸다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박았다. 다행히 인명사고는 없었지만 차가 크게 파손되어 긴 수리 기간을 가졌다. 오래된 연식에 어마한 주행거리가 신경 쓰였는데 사고는 의외로 졸음이나 빨리 가려는 습성에서 났다. 내가 하는 운전이 아니니 그저 액땜이려니 하고 마음을 추슬렀다. 시간이 약이라 괜찮다 싶다가도 치유되지 못한 불안은 언제고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이렇듯 마음에 굴곡을 일으킨다.
차창 밖 비에 씻긴 아침거리가 산뜻하다. 골목 안까지 시선을 훔치니 흠잡을 데가 없다. 작은 뜰을 품은 담벼락엔 능소화가 한 폭의 수채화다. 높다랗게 즐비한 아파트와 형형색색의 간판들은 반짝반짝 새것 같고 길 위로 사람들 걸음은 경쾌하다. 날로 새로운 도시풍경에 설레는 마음 안으로 버스 정류소가 눈에 들어온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서있다. 불현듯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 눈을 감는다. 너희들도 이 아침을 보고 있는지. 잊혔다 싶은 기억이 햇살 아래 또다시 선명하다.
가끔 그날을 손가락으로 헤아려 본다. 어느새 열을 넘기건만 기억이 뜨겁다. 아이들 학교 보내고 맞은 평화로운 오전이었다. 속보로 뜬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상황 파악이 어려웠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데. 바다 위에 기울어진 배 화면을 고정해 놓고 방송국 사람들이 지금 장난을 치나?’ 탕, 탕. TV를 치고 흔들었다. ‘어서 내려! 이러다 큰일 날라.’ 장난 같던 상황은 점점 실제가 되었다. 고함을 치며 화면 속 기울어진 여객선을 잡아 내리느라 있는 힘껏 용을 써도 배는 점점 손끝에서 사라졌다.
대문 밖으로 걸음을 놓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눈을 뜨나 감으나 바닷속을 헤맸다. 한날은 아이들을 건져 올렸고 한날은 아이들을 놓쳤다. 살갗 따뜻한 내 아이가 볼을 부비면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반찬 없는 밥상을 차려놓고 나는 다시 또 바닷속을 헤맸다. ‘나는 그곳에 있지 않아요.’ 노랫말에 실린 아이들 목소리를 듣고서야 조금씩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끝내 삼켰던 가시 같던 그 말은 무거운 숙제로 남아 아직도 일상을 흔든다.
그거 아는가, 나무들도 소통한다는 거. 숲에 서보면 안다. 숲이 다 비슷비슷해 보여도 숲마다 기운이 다르다. 어릴 적엔 나무들은 뿌리로 대화한다고 생각했다. 땅 위로 드러난 얽힌 나무뿌리를 흔히 보았고 쑥 뿌리건 칡뿌리건 캐보면 끝없이 땅속 깊이 뻗어있었다. 풀뿌리 나무뿌리 서로 엉켜 속닥속닥 말을 나누는 게 틀림없었다. 어느 정도 나이 드니 나뭇잎들이 바람의 말로 대화를 하는 것에 생각이 번졌다. 훨씬 친밀하고 먼 곳까지 정확해 보였다. 최근에 들으니, 나무들은 화학물질로 대화한단다. 해충을 쫓고 영양 정보를 공유하고 번식을 위해 끊임없이 세대를 이어 소통으로 공존했다.
식물도 끼리끼리 어울린다. 우리 집 정원만 봐도 십여 가지가 넘는 식물들이 피고 지는데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땅과 햇볕의 조건이 우선이겠으나 어디서나 잘 자라는 식물이라도 어울리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곧잘 있었다. 저들이 저들만의 언어로 무리를 선택한 것이리라. 식물도 이러하니 세를 이뤄 말만 해대는 사람들을 뭐라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언어가 나무보다 못하다 생각지 않는다. 하늘 아래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와 얽히고설켜 있다. 나 하나만의 상처란 것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소통하는 나무는 잘 알고 있다.
정오를 한참 지나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예정보다 늦었다. 휴게소에서 한잠 자고 몸풀기 운동도 하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가느라 늦었단다. 삼 년 전에 낸 대형 사고에 작년 사고까지 겪고 나니 이제는 좀 현실을 직시했는지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대비하는 모습이다. 천 마디 말보다 큰 위로다.
채송화를 뽑아낸 자리에 고양이가 엉덩이를 깔고 오수에 빠져있다. 후다닥 쫓는다. 고양이가 터를 잡고 뭉개면 남은 채송화는 물론 내년 채송화도 끝이다. 식물도 세를 이루면 동물을 이긴다. 채송화가 빽빽할 땐 건들지 않다가 채송화가 시든 철이 되면 배를 깔고 들어가 있는 고양이를 종종 봤다. 계속 살충제를 쓸 수는 없어 남아있는 채송화를 위해 개미 기피제를 검색한다. 레몬, 민트, 사과식초, 커피가루, 옥수숫가루, 베이킹소다와 설탕, 예상외로 개미가 싫어하는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채송화에 개미가 꼬였던 것은 수월하게 피고 지는 꽃이라 방관한 탓이다. 올가을엔 낡은 화분을 바꾸고 흙갈이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