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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iO Apr 04. 2023

영국에서 구한 첫 직장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

"영국에서 첫 직장을 구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모든 걸 두고 이 낯선 영국 땅으로 와서 살아온 지 벌써 스무 해도 지난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구인광고를 보고 "이거야, 정말 꿀잡이야" 하고 원서를 넣었고 별 기다림도 기대도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면접을 오라 했다. 그리고 턱 하니 붙어버린 것이다.

아직도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이 있기에 아이들이 방학일 때는 나도 방학이었으면 좋겠고 여름에는 한국을 두어 달 가야 하니 긴 시간 동안 눈치 없이 쉴 수 있는 직장, 그리고 무엇보다 낮에 혼자 집에 있는 시간들을 그냥 흘러버리는 것 같아 아까우니 그 몇 시간 동안 돈을 벌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일을 하기엔 지금 저녁에 해야 하는 일도 있고 또 너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일에 묶여버리는 삶은 시간도 안 될뿐더러 별로일 거 같다는 생각을 한 찰나.

이 직장은 이 모든 장점들을 다 갖춘 완벽한 직장이었다.

바로 EA(Education Authority) 영국 교육청에서 고용하는 '초 중고등학교 급식 보조사'였다.


그동안 영국에 와서 가끔씩 남편의 사업을 도와주기는 했지만 거의 이십 년이란 시간들 동안 전업주부로 아이들 둘을 돌보아야 했기에 직장생활을 한다는 부분은 거의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영어를 써야 하는 직장 속에서 현지인들보다 부족한 영어를 구사한다는 단점을 훨씬 뛰어넘어 영국 사람들보다 더 뚜렷한 장점이나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던 내가 영국에서 취업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뭐든 잘 도전하고 스스로 해결하는 걸 좋아했던 한국에서의 나의 성격과는 달리 영국에 와서는 영어를 써야 하는 모든 일들과 영어로 해결해야 하는 자질구레한 모든 일들은 남편을 의지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이 없었다면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까지 이제는 스스로 하지 않게 되니 점점 소심해지고 약해지고 자신감도 떨어지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사실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게 살아온 내가 남편의 도움 1도 없이 나 스스로 일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정말 뿌듯했다.


하지만 그 뿌듯함은 잠시, 친한 지인에게 꿀잡을 구했다고 자랑을 하고 설명을 하니 의외로 그 생각과 반응이 너무나도 달랐다.

정말 나를 아껴서 말해 주는데 대학까지 나와서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게 난 너무 안타깝다는 말을 해 준 것이다. 그 이후로 난 신기하게도 더 이상 다른 지인들에게는 직장을 구했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을 것이그렇다고 대신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냥 괜히 그 말을 듣고 나니 이제 그 부분이 내 단점이 되는 것 같아 말하기 싫어졌다. 진짜 이게 이렇게 하찮게 보이는 일일까. 괜히 마음이 소심해지고 고민들이 되기 시작했다.


일을 시작한 첫날, 학교에 도착하니 유니폼을 주었다. 예쁘게 드라이 한 머리는 모자로 가려야 했었고 아이들을 보면 웃으면서 친절하게 급식을 해야지 하면서 속눈썹까지 붙이고 이쁘게 화장도 했는데 급식을 하는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 나머지 두세 시간은 준비와 뒷정리, 설거지와 청소로 거지꼴이 되었다.


첫날은 행주를 빨면서 눈물이 났다.

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도 아닌데 영국 아줌마들보다 영어도 못 알아들으니 사소한 대화에도 집중을  해야 했고 괜히 눈치도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이러려고 대학을 나와서 그렇게 어렵게 공부를 했던가.

지인한테 들었던 모든 말들이 맞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집에서 흘러 보내는 시간들을 돈으로 번다는 생각만으로 감사와 뿌듯함으로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이 일이 점점 나의 자존감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렇게 뿌듯했던 나의 자신감을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 당당했던 자존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맘 깊이 내 자신과 대화를 해 보고 그 목록들을 차근차근 적어보았다.



1. 내가 일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이 일을 관두어도 당장 굶어 죽지는 않는다. 삶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만두기는 싫다. 이 시간 집에 있다고 더 행복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만 쓰고 빈둥빈둥 흘러 보내는 몇 시간을 돈을 버는 시간으로 생각하자. 먼저 10분으로 나누어서 얼마를 버는지 잘라서 생각하자. 어려운 일도 아닌데 10분 동안 내 몸을 움직이면 그냥 들어오는 이 돈은 절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럼 까짓 거 화장실 청소든 설거지든 뭐든 못할게 뭐 있어? 집에서는 무임금으로 청소 식사준비 설거지 다 하는데 여긴 돈도 주잖아.'


2. 이 일이 내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나의 목표는 아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 형편과 상황들을 모두 고려한 이 일은 지금 현재로서는 가장 현명하게 내가 선택한 일이다. 누군가가 아닌 내가 선택한 일이야. 우선 내 꿈과 내 목표만 생각하자.

주변 사람들의 의견은 중요하지만, 그것에 집착하면 나의 성장과 발전에 방해가 된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집착하지 않고, 나의 목표와 역량에 집중하자.


3. 지금 내 일에 안주하지 말고 항상 더 나은 일을 찾아보고 나를 위한 발전에 민감하자.

지금 이 일이 죽을 때까지 평생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언제든 더 나은 일로 바꿀 수 있고 난 발전할 수 있다.

난 더 큰일이 주어지면 더 큰 일을 잘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다.


4. 이 일은 누군가가 해야 할 꼭 필요한 일이다.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누군가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일이 필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나는 그 일에 필요한 역량을 갖추고 성장할 수 있다. 남들의 시선이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좌우하지 않도록, 나 자신이  일을 어떻게 보는지 생각해 보자.  


5. 감사의 마음을 가지자.

이 일은 내 힘으로 외국에서 내가 구한 첫 직장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낫기에, 내가 필요하기에 뽑혔다. 그리고 난 일의 종류와 상관없이 그 가로 당당하게 돈을 벌고 있다. 감사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6. 나의 역량을 인정해 주자.

난 이 낯선 땅에서 외국인으로서 첫 직장을 구했다. 이것은 이미 나 자신의 역량을 인정받은 증거이다. 나 자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7. 이왕 하기로 했다면 내가 주도적으로 일을 해 나가자.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내가 주도적으로 일을 찾아서 하자. 똑같은 집안일은 화장실도 청소하고 빨래도 설거지도 하면서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또 나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주도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돈을 받는 만큼 책임을 다 하고 내가 이 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자.


난 순간순간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내가 적은 이 리스트들을 다시 읽어보곤 한다.

어차피 내 인생은 내가 살아가야 하는 것이고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가치 있는 일에 난 오늘도 최선을 다 할 뿐이다.

그리고 난 우선 일이 필요하다. 

- 앞으로의 내 꿈과 내 목표를 위해 당장은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시기인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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