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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더스 FINDERS Oct 27. 2021

응답하라 <론리플래닛>

론리플래닛에 얽힌 특별한 기억 소환

여행 가이드북 <론리플래닛>을 아시나요. 지금까지 발행된 가이드북 수만 650여 종이 넘고, 전 세계 118개 국 이상 17개 언어로 번역해서 판매 중인, 명실상부 대표 여행 가이드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인터넷이 잘 발달하고 SNS로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는 게 익숙한 시대라서, 요즘엔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이드북을 펼쳐보는 일이 거의 없지요. 


밀레니얼 세대 끝자락에 붙어 있는 파인더스 에디터 2호는 2005년 떠났던 첫 배낭여행지인 인도에서 여행 가이드북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해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행 가이드북을 손에 들고 골목을 누비며 여행했던 경험은 잊혀지지 않지요. 함께 여행했던 친구들과 만나 각자의 인도 여행썰을 풀어내다보면 이틀 밤낮을 새도 모자라고요. 소중한 여행을 함께한 <론리플래닛>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인 것 같아요.


문득 <론리플래닛>에 얽힌 기억들을 소환하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4인의 여행가에게 물었어요.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단박에 회신온 답장을 여러분에게도 공개합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촬영 감독인 박종우 작가가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에 얽힌 특별한 인연을 전해주었습니다. <티벳 소금계곡의 마지막 마방> <차마고도-1000일의 기록> 등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벽돌 한 장 두께의 가이드북 
인도 편 가이드북 Ⓒ FINDERS

30년도 더 지난 시절의 얘기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이니 아마도 1988년 초쯤이었던가 보다. 나는 인도의 어느 시골마을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있었다. (네팔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인도와 네팔 국경 근처였으니) 당시 나는 여행 경비도 별로 넉넉치 않은 배낭여행자라 싸구려 게스트하우스의 도미토리를 전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전기가 들어오는 마을이었지만 수시로 정전이 되었기 때문에 해가 지면 합판을 엮어 만든 싸구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침대 베개 밑에 벽돌 같은 게 받쳐져서 목이 꺾이는 바람에 잠이 오지 않았다. 베개 밑으로 손을 넣어보니 벽돌이 아닌 두툼한 책이 하나 나왔다. <India – a travel survival kit>라는 제목의 영어판 여행 안내서였다. 출판사 이름은 영어 소문자로 lp라고 적혀 있었다. lp가 뭐지? 표지를 들춰봤더니 출판사의 정식 이름이 론리플래닛(Lonely Planet)이었다. ‘외로운 행성이라, 이거 멋진 이름이네!’ 론리플래닛이란 독특한 이름은 첫 만남에서부터 내 뇌리에 강하게 꽂혔다. 


론리플래닛 초창기에 출판되어 선풍적 인기를 모았던 <인도> 편 가이드북은 800페이지짜리 두툼한 책이었다. 정말 딱 벽돌 한 장 두께였으니 배낭여행자가 그 두꺼운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은 꽤 번거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인도에서 가이드북을 잘 보다가 네팔로 넘어가는 국경마을에 다음 여행자를 위해 책을 남겨두고 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해서 인도 가이드북을 들고 인도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만 이 가이드북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여행지에 대한 중립적인 시선, 정확한 정보, 마음에 쏙 드는 항목 구성 그리고 아주 세세한 핸드메이드 지도.


그 이후 외국여행을 다닐 때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은 내가 반드시 챙겨가는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론리플래닛은 영국 출신의 토니 휠러, 모린 휠러 부부가 영국에서 아시아를 거쳐 호주까지 여행하면서 집필했던 가이드북으로부터 처음 출발했다. 그러나 여행 가이드북으로서 론리플래닛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도록 기틀을 잡은 것은 그들 부부가 고용했던 여행 전문가 제프 크라우더 덕이었다. 


제프 크라우더는 내가 처음 발견했던 ‘인도-여행 서바이벌 키트’의 저자였고 거기에 적힌 그의 이력을 읽은 후 나는 괜스레 그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됐다. 그의 이력에는 ‘제프는 한국 여행중 만난 형분과 호주 열대우림의 낡은 바나나 플랜테이션에서 살고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 부인이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뭔가 연대감이 생기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론리플래닛 <한국>편의 저자이기도 했다. 


이제는 론리플래닛도 전자책으로 출판되므로 나는 더 이상 직접 가이드북을 구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내 서재에는 103권의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이 꽂혀 있다. 물론 내가 100개국 이상을 여행한 것은 아니다. 자주 여행하는 나라는 몇 년마다 새로운 가이드북이 출판되므로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구입을 하다 보니 100권이 넘게 된 것이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을 볼 때마다 내가 저 책을 들고 누볐던 세상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오늘날 론리플래닛의 기틀을 만든 제프 크라우더는 지난 달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제프와 한국인 부인 형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애쉴리 크라우더는 나와 같은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되었고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 인터넷에서 그의 아버지 부고 기사를 보고 언제 한번 만나서 막걸리나 한 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론리플래닛 얘기만 나누어도 하루로는 다 끝내지 못할 것 같다.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에세이스트, 수집가, 그리고 여행가로 살고 있는 이우일 카투니스트는 론리플래닛 가이드북과 어떤 인연이 있을까요?
신혼여행의 지침서
이우일 카투니스트의 그림 한 컷  Ⓒ FINDERS

요즘은 정말이지 상상하기 힘들지만 여행을 떠나려면 론리플래닛이 반드시 필요하던 시절이 존재했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그 시절엔 여행의 모든 걸 그 책 하나로 해결했다. 잠자리, 먹거리, 구경거리, 교통편까지 모두.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다. 그땐 여행지에서 론리플래닛 한 권을 들고 있으면 스마트폰을 손에 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사실 그 책은 스마트폰이나 인터넷보다 나은 점이 있었다. 훨씬 정제되고 사실에 가까운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책이 가진 장점을 온전히 지니고 있었으니까. 책은 상상력이다. 그 책은 누구나 여행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1996년 12월. 같은 해 10월부터 유럽 여행을 시작한 우린 추위에 떨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유럽 장기 신혼여행 중이었다(말이 신혼여행이지 그냥 배낭여행이었다). 유럽의 겨울은 예상보다 더 혹독했다. 추위를 피해 들어간 책방에서 우린 론리플래닛을 뒤적였다. 그리고 우리가 당장 가야 할 곳을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았다. 지중해 너머 이집트. 유럽은 아니었지만 우린 당장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았고, 무엇보다 론리플래닛이 있었으니까.



신발 브랜드 마더그라운드의 이근백 대표도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전국을 떠도는 보부스토어를 운영하는 그에게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은 어떤 의미일까요.
외롭지 않은 모험
Ⓒ FINDERS

어릴 적, 집 한편에 있던 지구본. 그 지구본에 가장 진한 색으로 칠해져 있는 곳이 티베트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언젠가 그곳에 꼭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배낭 하나 메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길을 지나 티베트 수도 라싸에 있는 포탈라궁까지 떠나는 여행을 머릿속에 그렸다. 대학교에 입학한 다음 해인 2001년. 꿈에 그리던 티베트로 떠날 준비를 했다. 누구에게나 꿈 같은 여행지는 아니었는지 당시만 해도 티베트에 대한 정보를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외로운 별’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여행책을 교보문고 외국어 서적 코너에서 발견하고는 서점 구석에 앉아 라싸 중심부의 지도와 티베트의 물가, 시장이 열리는 날, 가격별로 정리된 숙소들, 식당의 메뉴 그리고 히말라야와 야크, 오체투지를 하며 라싸로 향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고 또 봤다. 집을 나선 지 20여 일 만에 라싸에 도착한 그 날만큼 설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설렘 때문에 티베트를 다녀온 이후, 당시 론리플래닛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몽골, 위구르, 시베리아 같은 곳을 여행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때 그 시간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Discover a land without fences’ 론리플래닛 몽골 편 표지에 쓰여 있던 이 한 줄의 카피는 매일의 선택에서 여전히 깊은 영감을 준다.




<파인더스 매거진>의 고현 편집장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죠.
가이드북의 유효기간
론리플래닛과 함께 남미 종단 여행을 지켜준 수첩 Ⓒ FINDERS

나의 첫 론리플래닛은 대학생 때 구입한 'South America on a Shoestring'. 지금은 발행이 중단된, 저예산 배낭여행자를 위한 가이드북 시리즈였다. 1,0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책 1권에는 남미 대륙 12개국의 정보가 백과사전처럼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남미여행을 떠나 배낭 상단 포켓에 넣어둔 가이드북을 틈날 때마다 꺼내 읽었다. 파타고니아의 루타 40을 달리는 지루한 장거리 버스 뒷좌석에서도, 티티카카 호수를 곁에 둔 게스트하우스의 곰팡이 핀 소파에서도, 카르타헤나의 볕 좋은 광장의 노천 식당에서도. 책장이 닳도록 넘기고 넘겨도 끝은 보일 줄 몰랐다. 그 시절의 내 남미 종단 여행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말이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에 안내된 숙소나 식당을 찾아가면 꼭 누군가 남기고 간 다른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이 눈에 띄곤 했다. 그렇게 낯선 국가의 또 다른 가이드북을 뒤적이며 새로운 여행의 호기심과 열망을 일깨웠다. 아직 밟아보지 못한 생소한 지역과 도시를 깨알 같은 글로 훑으며 상상하는 여행의 즐거움. 대단히 먼 과거의 일도 아니지만, 이제 같은 방식으로 여행을 떠나도 그런 설렘이 충족될 수 있을지는 선뜻 확신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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