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대표작 여섯 편을 두 가지 코드로 읽었습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여섯 편을 읽고 두 가지 코드 정리해 보았습니다.
문학의 힘은 상상의 힘입니다.
문학은 개연성 있는 상상으로 서사를 구성하며,
묘사와 이미지의 힘으로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상상과 이미지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현실보다 더 살아있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한강 문학의 힘은 상상과 이미지를 결합하여 시적 언어로 형상화합니다.
고통과 희망의 연속적인 삶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살아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연약한 몸과 마음은 상처받고 고통받으면서도
불안한 존재의 영혼은 늘 평온한 일상을 꿈꿉니다.
『채식주의자』는 폭력을 상징하는 육식에 저항하며
끝내는 나무가 되고자 하는 한 사람의 고통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하고 색채이미지로 잘 보여줍니다.
『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는 국가적 폭력이 사람을 처참하게 파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 근대사는 국가폭력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강은 이러한 아픔을 묻어두지 않고 한 소년의 죽음을 그려서 고통과 상처를 불러옵니다.
『소년이 온다』에서 소년은 사라져 버린 지난날의 역사가 아니라
『소년이 온다』에서 동호로 다시 살아납니다.
또한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과거의 아픔을 소환합니다.
안녕이라는 안부를 물어야 했던 소중한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던 암울한 과거, 사랑하는 사람들과 끝끝내 작별하고 말았지만
차마 그 사람들을 보낼 수 없어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작품으로 살아 우리에게 담담하게 말합니다.
『검은 사슴』은 사라진 의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검은색은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날아오르기 전, 혼돈의 세계인 칠흑(漆黑) 같은 어둠 속에서 삶의 희망을 길어 올리는 이야기입니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죽음의 원인을 찾으며 존재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소설에는 재가 나오는데, 이는 깜깜한 밤하늘이 빛을 받아 잿빛의 검은 현(玄)으로 바뀌는 모습을 형상화합니다.
그리고 『흰』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눈처럼 하얗고 평온한 일상을 흰색의 색채이미지로 묘사합니다.
한강의 대표작 여섯 편을 폭력의 형상화와 색채 이미지로 읽어보았습니다.
첫째, 폭력의 형상화입니다.
『채식주의자』,『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세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은 폭력입니다.
폭력에 관하여 갈퉁과 지젝은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합니다.
요한 갈퉁은 직접접 폭력과 문화적 폭력, 구조적 폭력을 말하고,
지젝은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주관적 폭력과 상징적, 구조적 폭력 등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분류와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본질적인 폭력은 같습니다.
한강 소설에는 뼛속까지 스며든 폭력 때문에 일상을 잃어버리고
끝내 목숨을 잃어버린 연약한 생명의 이야기를 합니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세 작품은
폭력의 결과로 무너진 몸을 시적 언어인 이미지로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영혜의 몸’을 통해 보여주고
『소년이 온다』에서는 ‘관에 안치된 몸’을 보여줍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몸의 뼈’는 폭력 때문에
일상을 잃어버린 죽은 몸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채식주의자』에서는 폭력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주인공의 삶을 기울어진 이탤릭체로 표현합니다. 한강은 씨네 21과 인터뷰하면서 이탤릭체를 쓰는 이유를 밝혔는데,“소설을 쓸 때 시적으로 써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데, 나도 모르게 이탤릭체로 쓰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감정의 밀도가 어느 정도 차오르면 이탤릭체로 쓰게 되는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한강 『채식주의자』 20쪽
아버지의 육식 강요를 거부하는 주인공 영혜는 악몽을 꾸며 구조적 폭력에 저항하며 살아갑니다.
『장자』 「지락 편」에 구조적 폭력을 당하는 바닷새처럼은 영혜는 폭력을 당합니다.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자, 노나라 왕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음악을 연주해 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노나라 왕은 바닷새를 새의 입장에서 새을 대해야 하는데 사람의 입장으로 대하여 새를 죽게 합니다.
타자를 고려하지 않는 강요와 억압은 폭력이며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타자를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소년이 온다』에서는 여섯 명의 화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죽은 동호를 부릅니다.
동호는 80년 광주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살아서 우리 가슴으로 걸어옵니다.
그리고 일곱 명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폭력성과 존엄성에 대해 몸을 매개로 질문합니다.
처음에 네가 보았을 때 그녀는 십 대 후반이나 이십 대 초반의 자그마한 여자였는데,
썩어가면서 이제는 성인 남자만큼 몸피가 커졌다.
딸이나 여동생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천을 걷어 보일 때마다 너는 부패의 속도에 놀란다.
여자의 이마부터 왼쪽 눈과 광대뼈와 턱, 맨살이 드러난 왼쪽 가슴과 옆구리에는
수차례 대검으로 그은 자상이 있다.
곤봉으로 맞은 듯한 오른쪽 두개골은 움푹 함몰돼 뇌수가 보인다.
눈에 띄는 그 상처들이 가장 먼저 썩었다.
타박상을 입은 상체의 피멍들이 뒤따라 부패했다.
발톱에 투명한 매니큐어를 바른 발가락들은 외상이 없어 깨끗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생강 덩어리들처럼 굵고 거무스레해졌다.
정강이를 넉넉히 덮었던 물방울무늬 주름치마는 이제 부풀어 오른 무릎을 다 덮지 못한다.
한강, 『소년이 온다』 11~12쪽
80년 광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국가 폭력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처참하게 죽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것입니다.
작가는 눈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을 형상화하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합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경하는 인선을 통해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 겪은 제주 4·3 사건을
작별하지 않고 다시 만나게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인간이 해야 할 일과
차마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무엇인가?”를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거듭 묻고 있습니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우리는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요?
“피에 젖은 옷과 살이 함께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 거다. 악
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사 년 전 내가 썼
던 책에서 누락되었던, 대로에 선 비무장 시민들에게 군인들이 쏘았던 화염방사기처럼. 수포
들이 끓어오른 얼굴과 몸에 흰 페인트가 끼얹어진 채 응급실로 실려온 사람들처럼.”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287쪽
이 작품에서도 폭력 때문에 몸이 찢어지고 살이 삭아가는 '몸'을 형상화합니다.
이처럼 세 작품 속에 흐르는 폭력은 상처와 고통, 죽음과 이별의 아픔 속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둘째, 한강 소설의 색채 이미지를 주목하며 읽었습니다.
한강 소설 속에는 서사와 주제의식을 색채이미지로 표현합니다.
붉은색과 푸르스름한 색, 몽고반점의 초록색, 검은색, 그리고 흰색 등으로 주제를 형상화합니다.
색채 이미지는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폭력을 가하거나 당할 때의 색채는 붉은색이거나 폭력에 저항하는 색도 붉은색으로 표현합니다.
폭력의 당한 몸은 피를 흘리기도 하고 멍이 들기도 한다.
몸에는 폭력의 상처와 자국이 남습니다.
몸은 시간이 흐르면서 폭력의 자국을 지워가지만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고통의 트라우마는 남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것은 마음이고,
마음은 몸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됩니다.
『검은 사슴』은 인영과 명윤이 사라진 의선을 찾기 위해 황곡으로 가서 겪은 이야기를 서술합니다.
‘검은 사슴’의 이야기는 인영을 비롯한 인물의 존재를 위협하는 공포라기보다는 ‘검은’ 공간에서 ‘빛’을 희망하는 존재의 이야기입니다. 의선은 내면 깊은 곳에 불안을 느끼며 의사(疑似) 죽음 상태입니다. 어두운 공간에서 존재의 근원을 찾으려고 하는 모습이 검은 공간에서 빛을 찾으려는 ‘검은 사슴’과 유사합니다.
죽음을 마주해야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은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유와 유사합니다. 우리 인간은 죽음을 향해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을 마주한 후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깊은 땅속, 암반들이 뒤틀리거나 쪼개어져서 생긴 좁다란 틈을 따라 기어 다니며 사는 짐승이랍니다.
……그때부터 이 짐승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채 컴컴한 암반 사이를 느릿느릿 기어 다니며 흐느껴 웁니다. 마지막으로 숨이 넘어갈 때쯤 되면이 짐승의 살과 뼈는 검은 피와 눈물로 다 빠져나가, 들쥐 새끼만 하게 쭈그러들어 있다지요. 『검은 사슴』 243쪽~245쪽
깊은 땅속은 죽음을 상징하는 황천계곡과 같은 공간입니다.
땅속 깊은 곳은 칠흑(漆黑) 같은 어둠의 세계입니다.
어두운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삶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새롭게,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날아올라
희망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존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인영과 명윤은 의선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실존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검은 사슴이 어두운 땅속 깊은 곳에서 한 줄기 빛을 보고 살아가듯.....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정희는 인주의 사인(死因)과 관련된 진실을 찾고자 합니다.
이 소설은 사인(死因)의 진실 찾으면서 존재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작품 도입부에 타고 남은 재가 나옵니다.
재는 깜깜한 흑(黑) 빛이 아니라 밤하늘의 잿빛과 가까운 색입니다.
한자로 말하면 검을 현(玄)입니다.
흑(黑)과 현(玄)은 다릅니다.
흑은 블랙(Black)이고 현은 다크(Dark)입니다.
흑은 정말 까만색이고 현은 거무스름한 검은색입니다.
우리말의 “검”은 단군왕검의 검처럼 으뜸이나 우두머리를 뜻하고,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현묘(玄妙)함이기도입니다.
현묘함은 바람과 연결한 사람은 신라시대 최치원입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어둠 속에서 바람의 흐름 타고 가는 삶.
칠흑같이 어두운 까만색에서 만물이 태동하고
잿빛 검은 현(玄)에서 하늘이 빛을 머금고 밝아집니다.
그리고 해가 뜨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며 흰색이 되어
만물은 다시 살아 움직입니다.
죽음과 어둠은 절망이 아니라 삶의 시작이자 자유이고 희망입니다.
죽음을 향해 던져진 존재를 인식할 때 삶을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몽고반점』 에서 작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몽고반점을 식물의 태고적부터 간진학 생명력으로 생각하고,
비록 희미하게 색이 바래고 있지만 간직해야 할 초록의 생명의 점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초록의 생명을 간직하고, 나아가야 할 흰 생명의 근원을
소설 『흰』에서 형상화합니다.
흰색은 색이 없는 데 있음이며, 있는데 없음 나타냅니다.
흰색이 있어야 다른 색이 드러나며 흰색이 없어야 다른 색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 흰색은 구속이 없는 자유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당신의 눈으로 흰 배춧속 가장 깊고 환한 곳, 가장 귀하게 숨겨진 어린 잎사귀를 볼 것이다.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을 볼 것이다.
언젠가 빙하를 볼 것이다. 각진 굴곡마다 푸르스름한 그늘이 진 거대한 얼음을
생명이었던 적이 없어 더 신성한 생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올려다볼 것이다.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춰진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신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한강 『흰』 135쪽
한강의 소설 『흰』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절대로 더럽혀질 수가 없는 ‘흰’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흰 것에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라며 나열합니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등 삶과 죽음을 소슬하게 그리며
한강은 “더럽혀지더라도 너에게는 흰 것을 주고 싶다”라고 합니다.
혼돈의 검은색과 폭력의 붉은빛을 넘어 저항의 불꽃으로 초록 생명의 빛을 지니고
폭력과 상처가 없고 평화와 생명 가득한 눈처럼 깨끗하고 흰 세상을 지향합니다.
이처럼 한강 소설의 색채는 검은색- 붉은색- 초록색- 흰색을 지향하며
폭력과 상처, 고통과 절망을 넘어 평온한 일상을 지향하고
연약한 존재들이 강인한 삶을 시적언어와 이미지로 형상화합니다.
한강의 시 <유월>처럼 “살아라,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몽고반점처럼 생명의 숨을 잊지 말라는 당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넋이 존재한다면, 그 보이지 않는 움직임은 바로 그 나비를 닮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해 왔다.
그렇다면 이 도시의 혼들은 자신들이 총살된 벽 앞에 이따금 날아들어, 그렇게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파닥이며 거기 머무르곤 할까? 그러나 이 도시의 사람들이 그 벽 앞에 초를 밝히고 꽃을 바치는 것이 넋들을 위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가능한 한 오래 애도를 연장하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보다 사소하게, 그녀는 자신의 재건에 빠진 과정이 무엇이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몸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녀의 넋은 아직 육체에 깃들어 있다. 폭격에 완전히 부서지지 않아 새 건물 앞에 옮겨 세운 벽돌 벽의 일부 - 깨끗이 피가 씻겨나간 잔해 - 를 닮은,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은 육체 속에.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꿰매지 않은 자리마다 깨끗한 장막을 덧대 가렸다. 결별과 애도는 생략했다. 부서지지 않았다고 믿으면 더 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 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 자신의 것을 포함해 - 초를 밝힐 것.
한강 『흰』「넋」 108쪽~109쪽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작품을 기쁘고 벅차오르는 감동으로
'원서'로 읽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