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문체의 특징과 연암과 북학파의 역사인식
1. 애라하의 강폭은 우리나라의 임진강臨津江과 비슷하다. 곧바로 구련성九連城으로 향해 떠났다. 풀이 무성한 풀밭에는 장막이 세워져 있었고, 그 주위에는 호랑이를 잡는 그물이 넓게 쳐져 있었다. 의주의 창군鎗軍(창을 쓰는 군사)들이 곳곳에서 나무를 찍어 대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온 벌판에 쩡쩡 울렸다.
높은 언덕에 혼자 올라 머리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니, 산은 아름답고 물은 맑았다. 드넓은 벌판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나무들은 하늘까지 닿아 있는 듯했다. 큰 동네가 흐릿하게 바라보였고, 마치 개가 짖는 소리, 닭이 우는 소리가 귀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땅이 기름져 개간하여 경작을 해도 될 것 같았다. 패강浿江(대동강) 서쪽과 압록강 동쪽에는 이와 비교할 만한 땅이 없다. 큰 진鎭(군사 요충지)을 설치하고 큰 부府(도와 같은 등급의 행정구역)를 세울 만한 땅이었지만, 청나라나 조선 모두 이곳을 버려두고 있었다.
河廣似我國臨津。 卽向九連城, 綠蕪列幕, 周羅虎網。 義州鎗軍, 處處伐木, 聲震原野。 獨立高阜, 擧目四望, 山明水淸。 開局平遠, 樹木連天, 隱隱有大邨落, 如聞鷄犬之聲。 土地肥沃, 可以耕墾。 浿江以西, 鴨綠以東, 無與此比。 合置巨鎭雄府, 彼我兩棄, 遂成閒區。
2. 어떤 이의 말에 따르면, 일찍이 고구려 시대의 도읍지였던 국내성國內城이 바로 이곳 구련성이라고 했다. 황명皇明(명나라) 시절에는 진강부鎭江府가 있었는데, 지금 청나라가 요동遼東을 차지하자 진강부 사람들은 머리를 깎고 청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동의 백성들은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에게 몸을 맡기거나 우리나라 쪽으로도 들어와서 발을 붙였다. 그 뒤에 우리나라로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청나라 백성으로 인정해 되돌려 보냈고, 모문룡을 찾아가 의지했던 사람들은 유해劉海의 난리 때 많이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곳이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벌판으로 변한 지도 이제 거의 백여 년이 다 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 막연한 느낌이었지만, 산이 높고 물이 맑게 보이는 이유에는 다 이런 연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或云, 「高句麗時, 亦甞都此』, 所謂國內城。 皇明時爲鎭江府。 今淸陷遼, 則鎭江民人, 不肯剃頭, 或投毛文龍, 或投我國。 其後投我者, 盡爲淸人所刷還, 投文龍者, 多死于劉海之亂矣。 其爲空地, 且將百餘年, 漠然徒見山高而水淸者是也。
3. 노숙하는 처소를 여러 번 둘러보았다. 역관은 세 사람 혹은 다섯 사람씩 한 장막에 같이 묵었고, 역졸驛卒(역참 심부름꾼)과 쇄마구인刷馬驅人(지방 관청의 말을 모는 마부)은 각 조별로 열 명씩 시냇물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장막을 칠 나무를 얽어매고 있었다. 밥을 짓는 연기가 서로 이어지며 펴져 나갔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시끌벅적했고, 말은 목청을 높여 울부짖었다. 어엿한 마을이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한 무리의 의주 상인들은 저희끼리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시냇가에서 닭 수십 마리를 잡아서 씻고,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국을 끓이고 나물을 삶았다. 밥알은 밝게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노숙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푸짐한 저녁밥이었다.
行視諸露屯處, 譯官或三人一幕, 或五人同帳。 譯卒及刷馬驅人, 伍伍什什, 靠溪搆木, 炊烟相連。 人喧馬嘶, 儼成村閭, 灣商一隊, 自爲一屯。 臨溪洗數十鷄, 張網獵魚, 烹羹煑蔬, 飯顆明潤, 最爲豊腴。
4. 한참 뒤에 부사와 서장관이 차례로 도착했다. 해는 저물어 이미 황혼이 드리웠다. 삼십여 곳에 화톳불을 지폈는데, 모두 아름드리 큰 나무를 베어 온 것이라 이튿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타고 있었다. 군뢰가 나팔을 한 번 불면 바로 삼백여 명이 일제히 소리를 맞추어 고함을 질렀다. 이를테면 호랑이를 쫓는 '경호警虎'라는 것인데 밤새도록 이렇게 했다.
良久副使書狀, 次第來到。 日旣黃昏, 設燎三十餘處, 皆鋸截連抱巨木。 達曙通明, 軍牢吹角一聲, 則三百餘人, 齊聲吶喊, 所以警虎也。 竟夜如此。
5. 군뢰들은 의주의 관아에서 가장 기운이 센 자들을 뽑아서 데려왔는데, 우리 일행의 조례皁隷(관아의 사내종)들 중에서는 그들이 가장 사고도 많이 치고 먹기도 많이 먹는다고 했다. 그들의 차림새는 배를 그러안고 넘어질 정도로 웃겼다. 전립의 챙 안쪽에는 남색 구름무늬의 비단을 둘렸고, 높다란 꼭지에는 말갈기를 묶어 놓았으며, 운월雲月(구리쇠 고리)에는 다홍빛 상모象毛를 매달아 놓았다. 전립 앞쪽에는 날랠 '용勇'자를 금실로 자수를 놓았다. 그리고 검푸른 빛깔의 삼베로 만든 소매가 좁은 전복戰服, 다홍빛의 무명 배자褙子를 입었다. 허리에는 남색의 비단 전대纏帶를 눌러 띠었고, 어깨에는 주홍색 무명실로 만든 커다란 술을 걸쳤고, 발에는 매듭이 많은 미투리인 다이마혜多耳麻鞋를 신었다. 그들의 용모와 풍채를 살펴보니, 과연 한 무리의 건아들이었다. 다만 그들이 앉아 가는 말은 이른바 반부담마半負擔馬로, 안장을 얹지 않고 타고 있었다. 말을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웅크린 채 말을 타고 갔다. 그리고 등에는 진한 군령을 전하는 남색 깃발을 꽂았다. 한 손에는 군령판軍令版을 잡았고, 다른 한 손에는 붓, 벼루, 총채, 그리고 팔뚝만큼 굵은 마가목馬家木으로 만든 짧은 채찍을 들었다. 입으로는 나팔을 불었고, 앉은자리 밑에는 붉게 칠한 나무 몽둥이가 여남은 개를 꽂혀 있었다.
軍牢自灣府選待最健者, 一行皁隷中, 最多事而亦最多食云, 其打扮令人絶倒。 藍雲紋緞, 着裏氈笠, 鬉結高頂, 雲月懸茜紅, 毦毛帽前, 縷金着一個勇字。 鴉靑麻布, 狹袖戰服, 木紅綿布褙子, 腰繫藍方紗紬纏帶, 肩掛朱紅綿絲大絨, 足穿多耳麻鞋。 觀其身手, 果然是一對健兒也。 但所坐馬, 所謂半駙擔, 不鞍而駄, 非騎而踞, 背揷着正藍色小令旗, 一手持軍令版, 一手執筆硯蠅拂及一條如腕大馬家木短鞭, 口吹吶叭。 坐下斜揷十餘塗朱木棍。
6. 각 방房(정사, 부사, 서장관의 숙소)에서는 영을 내릴 작은 일만 생겨도 번번이 군뢰를 불렀고, 그러면 군뢰는 일부러 못 들은 체하곤 했다. 연달아 수십 차례를 부르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무어라고 씨부렁거리면서 그제야 들었다는 듯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부르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는 듯이 말이다. 군뢰는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돼지처럼 허둥거리며 소처럼 헐떡거리면 달려갔다. 나팔, 군령판, 붓, 벼루 등의 물건을 모두 한쪽 어깨에 멘 채 몽둥이하나는 땅에 질질 끌면서 달려갔다.
各房少有號令, 則輒呼軍牢. 軍牢陽若未聞, 連呼十數次, 則口中剌剌的誶責, 始乃高聲應喏。 若初聞呼聲然, 一躍下馬, 豕奔牛喘, 而吶叭及軍令版筆硯等物, 都掛一肩, 曳了一棍而去矣。
7. 밤이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장막 위로는 물이 새고, 풀 냄새가 심하게 나는 땅바닥은 축축하여 마땅히 피할 만한 곳이 없었다. 잠시 뒤 비는 개고 하늘에는 별들이 사방으로 드리웠는데, 마치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夜未半. 大雨暴霔。 帳幕上漏 ,草氣下濕, 無處可避。 少焉開霽, 天星四垂, 若可捫也。
『열하일기』 곳곳에서 연암 박지원은 여행 중 보고 겪은 일들을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넘기지 않고, 세심히 관찰하고 정밀하게 기록한다. 연암의 묘사는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장면을 재현한다. 이러한 묘사는 독자에게 당시 현장의 분위기와 정서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효과를 낸다. 특히 일상적 장면뿐 아니라 극적인 사건을 묘사할 때는 그 효과가 더욱 극대화된다.
<예시>
“애라하의 강폭은 우리나라의 임진강과 비슷하다. 곧바로 구련성으로 향해 떠났다. 풀이 무성한 풀밭에는 장막이 세워져 있었고, 그 주위에는 호랑이를 잡는 그물이 넓게 쳐져 있었다. 의주의 창군들이 곳곳에서 나무를 찍어 대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온 벌판에 쩡쩡 울렸다.
높은 언덕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산은 아름답고 물은 맑았다. 드넓은 벌판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나무들은 하늘에 닿을 듯 솟아 있었다. 멀리 큰 마을이 흐릿하게 보였고,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땅이 비옥하여 경작해도 좋을 만큼 풍요로웠다. 그러나 이곳은 청나라와 조선 모두 버려둔 상태였다.”
이러한 묘사는 연암이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 예리한 관찰자이자 현실 비판가였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가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자 했음을 시사한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통해 단순한 여행 기록을 넘어, 조선 지식인의 역사관과 민족의식을 드러낸다. 김명호 교수는 연암의 역사 인식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고대사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실지(失地) 회복의 당위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는 소중화주의를 계승하면서도, 그 안에 내재한 민족주의적 계기를 발전시킨 것이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 다수는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 자처하며 중화문명의 계승자라 여겼다. 이들은 기자(箕子)를 조선의 건국 시조로 숭배하고,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당연시했다. 조선 사대부들은 은나라 사람이었던 기자가 조선에 와 임금이 되었다는 기자동래설에 의존했고, 『동국통감』을 비롯한 여러 역사서를 통해 사대주의적 역사관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연암은 이러한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조선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주체적으로 인식하고자 했다. 그는 북벌론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청나라를 단순한 오랑캐로 보지 않고 실제적 세계 질서 속의 존재로 파악했다. 연암은 잃어버린 북방 영토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고, 고조선의 옛 땅인 요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서술했다.
그의 이러한 역사 인식은 1784년 『삼한총서』 기획과 연계된다. 연암은 이 책을 통해 통일신라 시대를 ‘남북국 시대’로 재편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발해국기』를 편입시켰다. 이는 유득공의 『발해고』 초고로도 보이며,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명확히 하고, 신라와 발해가 양립한 시대를 ‘남북국’으로 명명했다. 이러한 역사관은 소중화주의를 넘어서 민족 주체적 시각에서 우리 역사를 재편하고자 한 시도였다.
<예시>
“일찍이 고구려 시대 도읍지였던 국내성이 바로 구련성이라 한다. 명나라 시절에는 진강부가 있었는데, 청이 요동을 점령한 후 이곳 백성들은 머리를 깎고 청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이들은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의지하거나 조선으로 피신했으며, 이후 대부분은 다시 청나라 백성으로 송환되거나 혼란 속에 사망했다. \
이처럼 과거의 번영하던 지역이 백여 년 만에 텅 빈 벌판으로 변해버렸다는 설명은 그 땅의 역사와 현실을 통찰하게 한다.”
연암의 역사 인식은 단지 북벌론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북방사의 비중을 중시하며, 고구려-발해-요-금-청으로 이어지는 북국의 계보를, 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남국의 계보와 함께 아우르려 한다. 이러한 인식은 근대 이후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역사관이다.
유득공의 『발해고』는 그 대표적 산물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독자적 국가였음을 명확히 하며 남북국 시대론의 기틀을 마련했다.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정립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단지 학문적 재해석을 넘어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점차 주체적 역사관을 정립해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박지원의 예리한 현실 인식과 역사 인식이 응축된 작품이다. 그는 사실을 정확히 관찰하고 생생히 묘사함으로써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으며, 동시에 소중화주의를 넘어서는 민족적 주체 의식을 드러냈다. 연암의 역사 인식은 실지 회복의 당위성을 내포하면서도, 그 속에 깃든 조선 후기 지식인의 자주적 시각과 현실 비판의식이 깊이 배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열하일기』는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결정체이자, 우리 고유의 문체와 역사인식이 집약된 기념비적인 텍스트라 할 수 있다.
고려는 발해사를 만들지 않았으니, 고려가 부진했음을 알겠다.
옛날에 고씨(高氏)가 북쪽 지역을 차지하여 고구려(高句麗)라 하였고, 부여씨(夫餘氏)가 서남 지역을 차지하여 백제(百濟)라 하고, 박(朴)⋅석(昔)⋅김(金)씨가 동남 지역을 차지하여 신라(新羅)라 하였으니, 이것이 삼국(三國)이다. 마땅히 삼국사(三國史)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했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하고, 대씨(大氏)가 그 북쪽을 차지하고 발해(渤海)라 했으니, 이를 남북국(南北國)이라 한다. 마땅히 남북국(南北國)의 역사책이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인이다. 그가 차지하고 있던 곳은 어디인가? 바로 고구려 땅이다. 그 동쪽도 개척하고, 서쪽도 개척하고, 북쪽도 개척하여 나라를 크게 넓힌 것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하여, 왕씨(王氏)가 이를 통합하니, 고려(高麗)라 하였다. 그 남쪽에 김씨의 땅은 온전히 전부 차지하였으나, 북쪽의 대씨의 땅은 전부 차지하지 못하였으니, 혹 여진족이 들어오기도 하고, 혹 거란족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이 때에 고려를 위한 계책은 마땅히 급히 발해사를 편찬해야 한다. 그 다음 이를 근거로 “왜 우리에게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라고 여진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토문강(土門江) 북쪽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발해사를 바탕으로 “왜 우리에게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라고 거란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압록강(鴨綠江) 서쪽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발해의 역사를 편찬하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탄식을 금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발해는 요(遼)나라에 멸망되었으니 고려가 어떻게 그 역사를 편찬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다. 발해는 중국의 제도를 본받았으니 반드시 사관(史官)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 수도인 홀한성(忽汗城)이 함락되었을 때 세자를 비롯하여 고려로 망명한 자가 10여 만명이었다. 사관이 없었으면 반드시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다. 사관도 없고 역사서도 없다고 하더라도 세자에게 물어 보았다면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은계종(隱繼宗-고려에 망명한 발해 지배층 유민)에게 물어 보았다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10여 만명에게 물어 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張建章)은 당(唐)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이 어찌 홀로 발해 역사를 편찬할 수 없었단 말인가? 아, 문헌이 흩어져 없어진 지 수백년이 지난 뒤에 비록 역사서를 지으려 해도 할 수가 없다.
내가 내각(內閣)의 관리로 있으면서 궁중 도서를 많이 읽고, 다음의 발해에 관한 사항들을 편찬하여 군고(君考)⋅신고(臣考)⋅지리고(地理考)⋅직관고(職官考)⋅의장고(儀章考)⋅물산고(物産考)⋅국어고(國語考)⋅국서고(國書考)⋅속국고(屬國考) 등 아홉 가지를 만들었다. 이것을 세가(世家)⋅전(傳)⋅지(志)라고 하지 않고, 고(考)라 말한 것은 아직 역사책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 또한 감히 역사가로 자처할 수 없다고 하겠다.
갑진년(1784) 윤3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