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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08 도강록 계유일 01]

강세작과 득룡, 그리고 광해군의 실리외교 정책

by 백승호

1. 6월 26일 계유일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가 늦게서야 맑아졌다.

구련성을 떠나 삼십 리를 가서

금석산金石山 기슭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다시 삼십 리 길을 더 가서 총수葱秀에서 노숙했다.

날이 밝자마자 안개를 무릅쓰고 출발했다. 상판사上判事의 마두 득룡得龍이 쇄마 마부들에게 강세작康世爵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득룡은 멀리 안갯속에 어슴푸레 보이는 금석산金石山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기가 바로 호북성 형주荊州 사람 강세작이 숨어 있던 곳이었다네.”라고 말하는데

그 이야기가 정말이지 흥미진진하여 들을 만했다.

二十六日癸酉 (朝霧晩晴)

發九連城, 行三十里, 到金石山下中火。 又行三十里, 露宿葱莠。

旣曉, 冐霧發行。 上判事馬頭得龍, 與刷馬驅人輩, 談說康世爵事。 霧中遙指金石山曰, 「此荊州人康世爵所隱處。」 其說津津可聽。


2. 강세작의 조부 강림康霖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를 따라 우리나라에 구원병으로 왔다가 황해도 평산平山 싸움에서 죽었다. 세작의 아버지 강국태康國泰는 산동山東 청주清州에서 통판通判(중앙에서 파견된 감찰관)을 지냈는데, 만력萬暦 정사년丁巳年(1617년)에 어떤 일에 연루되어 요양遼陽으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그때 세작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는데, 아버지를 따라 요양에 왔다.

그 이듬해에 청나라가 무순撫順을 함락하자 유격장군游擊將軍(변방 주둔지의 하급 군관) 이영방李永芳은 항복한다. 경략經略(총독 위의 지위) 양호가 장수들을 여러 지역으로 파견했는데, 총병摠兵(임시직 고급 군관) 두송杜松은 개원開原으로 보냈고,총병 왕상건王尙乾은 무순으로 보냈다. 그리고 총병 이여백李如栢은 청하清河로 보냈고, 도독都督 유정劉綎은 우모령牛毛嶺으로 보냈다. 이때 강국태 부자는 유정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청나라의 복병이 계곡에 숨어 있다가 나타났다. 명나라의 군사는 앞서가던 부대와 뒤따라오는 부대 앞뒤가 잘리면서 서로 지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유정은 스스로 분신해 죽었고, 강국태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세작은 해가 저문 뒤에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골짜기에 묻고, 돌을 모아 알아볼 수 있게 표시를 해 놓았다고 한다.

葢世爵祖霖 從楊鎬東援我國, 死於平山。 父國泰官靑州通判, 萬曆丁巳, 坐事謫遼陽, 世爵年十八, 隨父在遼陽。 明年, 淸人陷撫順, 游擊將軍李永芳降, 經略楊鎬, 分遣諸將, 摠兵杜松出開原, 摠兵王尙乾出撫順, 摠兵李如栢出淸河, 都督劉綎出毛嶺。 國泰父子從劉綎。 淸伏兵從陿中出, 大軍前後不相救。 劉綎自燒死, 國泰中流矢仆。 世爵日暮得父屍, 埋谷中, 聚石以識之。


3. 이때(1619년) 조선의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과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는 산 위에서 진을 쳤고, 조선의 좌우 진영 장수들은 산 밑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세작은 도원수의 진영으로 몸을 피했고, 다음 날 청나라 병사들이 조선의 좌영(左營)을 공격하자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산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조선 군사들은 무서워 모두 다리를 덜덜 떨었고 강홍립은 싸워보지 않고 그냥 항복했다. 청나라 병사들은 강흥립의 군사를 몇 겹으로 에워싼 뒤, 도망쳐 온 명나라 병사들을 찾아내 양손을 뒤로 묶어 몰고 가서 모조리 칼로 목을 베어 죽였다.

時朝鮮都元帥姜弘立, 副元帥金景瑞, 陣山上, 朝鮮左右營將, 陣山下。 世爵投元帥陣。 明日, 淸兵擊朝鮮左營, 無一人得脫。 山上軍望見皆股栗, 弘立不戰而降。 淸人圍弘立軍數匝, 搜明兵之竄入者, 反縛驅出, 皆劒斬之。


4. 세작도 두 손이 꽁꽁 묶인 채 큰 바위 아래 앉아 있었는데, 목을 베던 자가 깜빡 잊고 그냥 가 버렸다. 그러자 세작이 조선 군사에게 줄을 좀 풀어 달라고 애걸했지만, 그들은 서로 눈을 흘기면서 쳐다만 볼 뿐 감히 움직이려고 하는 자가 없었다. 세작은 자기 힘으로 줄을 등 뒤에 있던 바위 모서리에 대고 비벼서 끊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죽은 조선 군사의 옷을 벗겨 바꿔 입고, 조선 병사 틈으로 들어가 운 좋게 화를 면했다. 그렇게 해서 세작은 요양으로 걸어서 돌아갔는데, 때마침 명나라의 웅정필熊廷弼이 요양을 장악하게 되면서 세작을 불러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라고 했다.

世爵被縛坐大石下, 主者忽忘而去。 世爵目朝鮮兵, 乞解其縛, 朝鮮兵相睥睨莫敢動。 世爵自以背磨之石, 楞縛繩斷, 遂起脫朝鮮死者衣, 換着之, 攛入朝鮮兵中以得免, 於是走還遼陽。 及熊廷弼鎭遼陽, 招世爵使復父讎。


5. 이 해에 청나라는 연이어 요동의 개원과 철령鐵嶺을 함락했고, 명나라는 바로 웅정필을 잡아들이고 그 대신에 설국용薛國用(요동순무, 경략요동 역임함)을 보내서 요양을 지키게 했다. 강세작은 계속해서 설국용의 진중에 남아있었지만, 마침 심양이 청나라에 함락되어 버린다. 세작은 낮에는 숨어 지내다가 밤에는 걸어서 봉황성鳳凰城에 도착했다. 세작은 광녕廣寧 사람 유광한劉光漢과 함께 요양에 남아 있던 패잔병을 모아서 성을 지켰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유광한은 전장에서 죽고, 세작도 창에 십여 군데 찔려 상처를 입는다.

是年, 淸人連陷開原鐵嶺, 則逮廷弼, 以薛國用代之。 世爵仍留薛軍中, 及瀋陽陷, 世爵晝伏夜行, 抵鳳凰城, 與廣寧人劉光漢, 收遼陽散卒, 共守之。 未幾, 光漢戰死, 世爵亦被十餘鎗。


6. 세작은 중원으로 가는 길은 이미 끊어졌으니, 차라리 동쪽 조선땅으로 도망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오랑캐 변발을 하고 그들의 옷을 입어야 하는 화를 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변문을 넘어 여기 금석산으로 숨어들었다. 양가죽 옷을 불에 구워 먹고,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면서 몇 달 동안 목숨을 부지했다.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관서 지역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다가 회령까지 굴러 들었고, 조선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아들 둘을 낳았다고 한다. 세작은 나이 팔십여 살이 되어서 죽었고, 그 자손은 늘어나서 백여 명이나 되었고, 아직도 한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自念中原路絶, 不如東出朝鮮, 猶得免薙髮左衽, 遂走穿塞, 隱金石山。 燎羊裘, 裹木葉以咽之, 數月得不死。 遂渡鴨綠江, 遍歷關西諸郡, 轉入會寧。 遂娶東婦生二子, 世爵年八十餘卒。 子孫蕃衍, 至百餘人. 而猶同居云。


7. 득룡得龍은 가산嘉山(평북 박천博川) 사람으로, 열네 살 때부터 연경을 드나들었다. 이번이 중국을 삼십여 번째 가는 것으로 화어華語를 가장 잘했다. 우리 일행의 모든 대소사는 득룡이 아니면 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는 이미 고향인 가산을 비롯한 의주부, 철산부 등지에서 중군中軍(지방 장관 밑의 무관)을 지냈고, 품계도 가선대부嘉善大夫(현재의 차관급) 종 이품 문관 품계를 받았다.

得龍, 嘉山人也, 自十四歲, 出入燕中, 今三十餘次。 最善華語, 行中大小事例, 非得龍, 莫可當此任者。 已經本郡及龍鐵等諸府中軍, 階得嘉善。


8. 매번 사행 길에 오를 때면, 미리 고향 가산군 관아에 공문을 보내 자신의 차지次知(집안을 맡아서 하는 담당자)와 득룡의 식구를 가두어 놓고 인질처럼 붙잡아 두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득룡이 도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이런 것만 보아도 득룡의 재주와 능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강세작은 처음 조선으로 빠져나왔을 때 득룡의 집에서 손님으로 지냈었는데, 그때 득룡의 할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 화어와 조선말을 배우게 된 것이었다. 득룡이 중국말을 잘하는 이유는 집안 대대로 전해져 오는 학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날이 저물어서야 총수葱莠에 도착했다. 꼭 황해도 평산平山의 총수와 비슷했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이 지명을 붙인 것으로 이는 평산의 총수가 이곳과 모양이 비슷해서 같은 지명을 붙인 것이 아닐까?

而每使行, 則預關本郡, 囚其次知, 家屬, 謂之次知, 以防其逃避。 其爲人之幹能可知。 方世爵初出時, 客得龍家, 與得龍祖善, 互學華東語。 得龍之善漢語, 乃其家學云。

日旣暮, 抵葱莠。 恰似平山葱莠。 想我國人所名, 抑平山葱秀, 以類爲名否。


[해설]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실용정책

"조선 군사들은 무서워 모두 다리를 덜덜 떨었고 강홍립은 싸워보지 않고 그냥 항복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왜 강홍립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는가?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은 임진왜란 이후에 즉위하여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고 백성을 보살피기 위해 다양한 개혁 정책을 추진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국가 재정 복구, 토지 대장을 정비하여 대동법을 시행한다. 또한 명(明) 나라와 후금(後金)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추진 실질적인 국익을 도모한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후금이 강성해지면서 새로운 외교 전략이 필요해졌다.

광해군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는 실리 외교를 선택했다. 특히 1618년, 명나라가 조선을 끌어들여 후금과 싸우게 한 '강홍립의 부차전투'에서, 광해군은 명의 요구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되, 실질적으로 후금과 불필요한 전쟁을 하지 않도록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려 후금과 싸우지 말고 소극적으로 대항하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부차전투*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참조

부차전투 (富車戰鬪) 1618년 광해군 10년에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만주 부차(富車)에서 후금군과 벌인 전투.


후금의 태조 누루하치가 만주의 대부분을 통일하고 명나라에 대해 적대감정을 가지고 그 세력이 날로 팽창하자 명나라는 후금을 칠 계책을 세우고 조선에 원병을 청해 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출병에 대해 찬반양론이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왜병을 격퇴시키는데 협조했고,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양호(楊鎬)가 요동경략(遼東經略)에 임명되었기에 명분상 거절할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都元帥), 평안병사 김응서(金應瑞)를 부원수(副元帥), 정호서(丁好恕) · 이민환(李民寏) · 이정남(李珽男) · 김응하(金應河) · 정응정(鄭應井) 등을 문무종사관(文武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포수(砲手) 3,500명, 사수(射手) 6,500명, 도합 1만 명을 거느리고 평안도 경계상에서 대기하게 하였다. 명나라는 요동경략 양호의 총지휘 아래 총 병력 10만 명을 4대(隊)로 나누었다.

즉 좌익(左翼)의 마림(馬林)이 이끄는 군은 개원(開原) 방면에서, 중앙의 두송(杜松)이 이끄는 군은 봉천(奉川) 방면에서, 우익(右翼)의 이여백(李如柏)이 이끄는 군은 청하(淸河) 방면에서, 남부(南部)의 유정(劉綎)이 이끄는 군은 관전(寬甸)으로부터 조선의 강홍립과 연합해 진출하게 하였다. 강홍립은 1618년(광해군 10) 10월에 창성(昌城)에 이르렀다. 이듬해 2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유정의 군과 관전 방면에서 합류해 동가강(佟佳江)을 따라 회인(懷仁)에서 노성(老城)으로 향하였다.

같은 해 3월 1일 남로군을 제외한 3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복배에서 후금군을 협격하였다. 그러나 작전에 차질이 생겨 두송의 군은 사르후[薩爾滸]에서 대패하고, 다음날 마림의 군도 급습을 당해 무너졌다. 이어 후금군은 북상하는 유정의 군을 노성 남쪽 부차에서 요격해 격파하였다.

이때 참전했던 조선군에서도 선천군수(宣川郡守) 김응하, 운산군수(雲山郡守) 이계종(李繼宗) 등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강홍립 · 김응서 등은 적진과 통해 출전이 본뜻이 아님을 알리고 투항해 부차정벌이 실패로 끝났다. 강홍립이 적에 투항한 것은 본인의 뜻이 아니었으며 광해군으로부터 “형세를 보아서 향배를 정하라.”라고 한 밀지(密旨)를 받았던 까닭이라 한다. 강홍립 등은 적중에 있으면서 그 내부 사정을 본국에 알리고 또 양국의 화의(和議)를 성립시키려고 정부에 알선한 일도 있으나 대부분의 투항한 장병들은 그 뒤 귀환하였다.



미중 갈등과 외교 한국의 외교 전략

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은 광해군 때 후금의 부상과 명나라의 몰락과 유사하다. 광해군은 중립적이고 때로는 이중적인 외교를 통해 우리나라의 실리를 취했다. 대륙에서는 여진족의 후금(청)이 건국되어 명나라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진퇴양난의 고비를 만난 광해군이 사신 정춘신을 만포첨사로 임명하여 보내기도 하고 첩자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며 세운 외교 전략은 ‘명나라에 예의는 지키되 지나친 요구는 거부하고, 오랑캐 후금은 다독거리며 실리외교를 폈다. 또한 광해군이 수도 없이 군사력을 강화시키라고 화약 무기를 준비하라고 명을 내려 나름대로 자주국방을 준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지금 G2 외교에서 중립적이고 실리외교를 펴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은 한국을 내세워 중국을 견제하려고 한다. 한국은 혜안과 균형감각을 가지고 중국이 갖고 있는 내적 위험요소를 고려하면서 경제적 이익의 균형과 외교안보적 세력 균형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심화되고 이로 인하여 한국에 부정적 영향을 주면 우리의 경제적 손실과 한미 우호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서는 균형외교 전략과 남북관계 회복이 중요하다. 한국이 중국에 대해 정도를 넘어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국익과 상반된다. 중국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만큼 미국으로부터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반대급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에서 한국 기업을 고려하겠다는 것은 반대급부가 아니라 첨단 기술유출과 국내 일자리 상실이라는 부정적인 결과가 더 크다.


윤석열 재임 당시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은 "중국 성장이 둔화되고 있고, 내수 중심의 전략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지난 20년간 우리가 누려 왔던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시대는 끝나가고 있습니다"라고 하며 탈 중국 선언을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중국이 불만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불리한 행동을 한다면 옳은 행동이 아니라고 얘기해야 한다. 경제보복 가능성도 없다고 보며 중국과 우리나라의 분업체계는 원숙한 정도"라고 했다. 이러한 탈 중국 선언이나 안이한 사고방식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해 전체 수출의 25%, 수입의 22.5%가 중국이다.


우리가 남북관계를 주도하면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미국과 중국의 갈등 요소를 완화시킬 수 있다면 중재자로서의 우리 입지도 보다 단단해질 수 있다. 동아시아 지역 질서가 재편되는 10년의 시기를 내다보면서 창의적이고 자주적인 외교력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권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미국과 군사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경제교류를 해야 한다. 미중갈등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신냉전체제로 국제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과거에는 군사 정치적 냉전이었지만 지금은 경제적 냉전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국익을 꾀해야 하는데 어느 한 편을 들면 위험하다. 미국 편을 들거나 일본에게 저자세로 나가며, 중국을 표 나게 견제하고 북한을 적대시하면 한반도 전쟁위기가 찾아온다. 최근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한반도 외교 전략은 경쟁과 협력의 국제 관계 속에서 협력을 명분으로 미국과 중국을 설득하는 외교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와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서는 미국과 중국의 협력이 필요하다. 미국은 반도체 산업이나 경제 발전에 한국이 필요하고 중국도 한국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을 잘 활용하는 외교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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