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지리관
1. 6월 27일 갑술일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가 늦게야 걷혔다.
날이 밝자마자 길을 떠났다. 도중에 되놈(만주족) 대여섯 사람을 만났는데, 모두 조그마한 당나귀를 타고 있었다. 모자와 옷은 남루했고, 얼굴은 많이 지쳐 피곤해 보였다. 그들은 모두 봉성의 군사들인데, 남에게 품삯을 받고 고용되어 애랄하愛刺河에 수자리 살러(국경을 지키러) 간다고 했다. 우리 조선의 변방은 아무 근심할 게 없는데, 중국 변방 수비는 느슨하고 허술한 듯하다.
二十七日甲戌 (朝霧晩晴)
平明發行。 路逢五六胡人, 皆騎小驢。 帽服繿縷, 容貌疲殘。 皆鳳城甲軍, 往戍愛刺河, 而雇人倩往云, 「東方則誠無慮矣。 然中國邊備可謂踈矣。」
2. 마두와 쇄마 말꾼들이 되놈들을 향해 나귀에서 내리라고 호통을 친다. 앞서가던 두 놈은 내려서 한쪽으로 비켜서 걸어가는데, 뒤에서 가던 되놈 세 명은 절대 내리려 하지 않는다. 마두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 내리라고 꾸짖으니, 그들은 눈을 부라리며 째려보면서 말했다.
“당신 상관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하고 대거리를 한다.
마두가 곧장 달려가서 채찍을 빼앗아, 벌겋게 드러낸 종아리를 갈기며 말했다.
“우리 대인께서 받들고 가는 물건이 어떤 물건인지 아느냐? 지니고 가는 문서가 어떤 문서인 줄 아느냐? 저 황색 깃발에 ‘황제 폐하 어전에 올리는 물건이라고 쓰여 있지 않으냐? 너희 놈들은 눈이 너무 멀었구나. 황제 어전에 올릴 물건을 알아보질 못하다니!”
馬頭及刷馬驅人輩, 喝令下驢, 前行兩胡, 下驢側行, 後行三胡, 不肯下驢。 馬頭輩齊聲叱下, 則怒目直視曰, 「爾們的大人干我甚事。」 馬頭直前奪其鞭, 擊其赤脚曰 「吾們的大人, 陪奉是何等物件, 賫來是何等文書, 黃旗上明明的寫着萬歲爺御前上用。爾們好不患瞎, 還不認過了皇上御用的。」
그들은 그제야 나귀에서 내려 땅에 엎드렸다.
"그저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라고 한다.
그중 한 녀석이 일어나더니 자문咨文(외교 문서)를 가지고 가는 마두의 허리를 껴안으면서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나으리, 화를 푸십시오. 소인들은 모두 죽어야 마땅합니다."라고 했다. 마두들이 모두 껄껄 웃었다. 그러고는 크게 꾸짖으면서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라고 소리쳤다. 그들이 모두 진흙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니, 이마는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마두배들이 모두 크게 웃었으면서 얼른 물러가라고 소리를 지른다. 내가 말했다.
"내 듣기에 네놈들이 청나라에 들어갈 때마다 말썽을 부린다고 하더니 오늘 내 눈으로 직접 보니 과연 듣던 대로구나. 조금 전처럼 쓸데없는 짓거리는 다음부터 장난으로라도 하지 말거라."
마두들이 “에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먼 여행길에 무슨 소일거리로 보내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其人下驢伏地, 稱死罪, 一人起抱咨文馬頭腰, 滿面歡笑曰, 「老爺息怒。 小人們該死的。」 馬頭輩皆大笑, 叱令叩頭謝罪, 皆跪伏于泥中, 以首頓地。黃泥滿額, 一行皆大笑, 叱令退去。 余曰 「聞汝輩入中國, 多惹鬧端云, 吾今目覩, 果驗前聞。俄者亦涉不緊, 此後切勿因戱起鬧。」 皆對曰 「不如此, 長途永, 日 無以消遣。」
3. 멀리 봉황산鳳凰山을 바라보니, 마치 다듬지 않은 돌을 쌓아서 만든 것처럼 견고하게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주먹을 쥐고 엄지손가락을 세운 것 같기도 했고, 부용의 꽃봉오리가 반쯤 피어난 것 같기도 했으며, 하늘가에 떠 있는 여름 구름 같기도 했다. 깎아 세운 듯이 우뚝 솟은 빼어난 산세와 그 고결한 기품은 말로써는 어찌 다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다만 밝고 부드러운 기운이 모자라는 것이 흠이었다.
望見鳳凰山, 恰是純石造成。 拔地特起, 如擘掌立指, 如半開芙蓉, 如天末夏雲。 秀峭戌削, 不可名狀, 而但欠淸潤之氣。
나는 일찍이 우리 서울의 도봉산과 삼각산이 금강산보다 낫다고 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금강산은 바로 신선이 사는 곳으로, 이른바 일만이천봉이다. 어느 봉우리나 기이하면서도 높고, 웅장하면서도 깊지 않은 것이 없다. 짐승들은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사이를 뛰어다니고, 새들은 이 봉우리 저 봉우리 사이를 빙빙 돌며 날아다닌다. 신선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부처는 어디선가 뛰어내려 올 것 같다. 하지만 그 음산하고 까마득한 분위기는 마치 귀신이 사는 동굴 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예전에 나는 신원발申元發과 함께 단발령斷髮嶺올라가 금강산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때마침 가을하늘은 아주 파랗고 석양은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가는 듯한 빼어난 경치는 없었고, 번지르르한 자태만 드러내는 듯한 모양새였다. 금강산을 위해 안타까운 탄식을 한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甞謂我京道峯三角, 勝於金剛。 何則, 金剛卽其洞府所謂萬二千峯, 非不奇峻雄深, 獸挐禽翔, 仙騰佛跌, 而陰森渺冥, 如入鬼窟。 余甞與申元發登斷髮嶺, 望見金剛山。 時方秋天深碧, 夕陽斜映, 無干霄秀色, 出身潤態, 未甞不爲金剛一歎。
그러고 나서 한강의 상류에서 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두미강斗尾江(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서울 광나루 까지 한강) 어귀를 빠져나가면서 서쪽으로 멀리 한양을 바라보았다. 삼각산 여러 봉우리가 하늘 끝까지 뻗은 채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산에서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희미하게 어른거리고 엷은 안개가 피어올라 맑고 아름다웠으며 우아하고 아리따웠다. 또 한 번은 남한산성의 남문에 앉아서 북으로 한양을 바라보는데 삼각산이 마치 물 위에 꽃이 핀 듯, 거울 속에 달이 비치는 듯했다.
及自上流舟下, 出頭尾江口, 西望漢陽, 三角諸山, 摩霄出靑, 微嵐淡靄, 明媚婀娜。 又甞坐南漢南門, 北望漢陽, 如水花鏡月。
어떤 사람은 “하늘에 떠 있는 광풍光風(맑고 고결한 기운)을 왕기旺氣(흥성할 기운)라고 말했는데, 왕기旺氣가 바로 왕기王氣(임금이 날 기운)를 뜻한다."라고 말했다. 우리 한양은 용이 억만년이나 몸을 서리고 범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세를 갖추고 있다. 그 신령스럽고 밝은 기운은 당연히 다른 산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 봉황산이 가진 산세의 기이함이나 험준함은 비록 도봉산이나 삼각산보다는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하늘에 떠 있는 저 맑고 고결한 왕기는 한양의 여러 산들에 크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
或曰, 「光風浮空, 乃旺氣也。」 旺氣者, 王氣也。 爲我京億萬載龍盤虎踞之勢, 其靈明之氣, 宜異乎他山也。 今此山勢之奇峭峻拔, 雖過道峯三角, 而其浮空光氣, 大不及漢陽諸山矣。
[해설]
연암 박지원의 자연관과 지리관: 조선 산하를 품은 주체적 시선
1. 우리의 산하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
연암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이자 문인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있어 깊이 있는 통찰과 독자적인 시각을 지닌 인물이다. 특히 자연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단순한 감상에 머물지 않고, 산천의 형세 속에 깃든 기운(氣)을 읽어내며, 그 안에 조선의 정신과 품격을 투영하고자 했다.
그는 금강산보다 도봉산과 삼각산을 더 으뜸으로 여겼고, 청나라의 봉황산이 아무리 기이하고 웅장하더라도 한양의 산들이 뿜어내는 왕기(王氣)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연암은 외래의 문물을 무조건 숭상하거나 미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조선의 산하와 조선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자부심을 느낀,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자연관과 지리관을 지녔다.
2. 형세보다 기운, 외형보다 본질을 본 안목
① 금강산·봉황산보다 삼각산의 ‘왕기’
연암은 금강산의 기이하고 웅장한 형세를 인정하면서도, “신선이 날고 부처가 뛰어내릴 듯한 분위기”가 오히려 “음산하고 귀신이 사는 동굴 같다”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천태만상의 절경이라 하더라도, 맑고 고결한 기운이 없다면 진정한 감동을 줄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반면 도봉산과 삼각산은 단지 높은 산세를 넘어, 창공과 어우러진 광풍(光風)과 윤기를 머금은 산으로 평가된다. “삼각산은 마치 물 위에 핀 꽃, 거울 속에 비친 달”이라는 표현은 그 산에 깃든 맑고 청정한 기운의 고결함을 상징한다. 연암은 화려한 외형보다 산이 품고 있는 본질적 기(氣), 그중에서도 조선 왕도로서의 위엄과 기품을 담은 ‘왕기’를 더 소중히 여겼으며, 그 안에 조선 산하에 대한 깊은 자부심을 담았다.
② 여러 각도에서 산을 관찰한 주도면밀한 시선
연암은 자연을 단편적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한강 상류에서 배를 타고 내려오며 삼각산을 멀리 조망했고, 또 남한산성 남문에 앉아 북쪽 한양을 바라보며 같은 산을 다른 각도에서 관찰했다. 한강에서 본 삼각산은 푸른 기운과 엷은 안갯속에 우아한 자태를 뽐냈고, 남한산성에서 본 모습은 물 위의 꽃, 거울 속 달처럼 아련하고 신비로웠다.
이렇듯 동일한 대상을 다양한 시점과 분위기에서 살펴보는 연암의 태도는, 그의 자연관이 단순한 미학적 감상을 넘어 경험, 사유, 이성이 어우러진 주체적이고 총체적인 인식임을 보여준다.
3. 조선의 산하와 조선 사람에 주체적 인식
연암은 청나라의 문물과 산천을 직접 접하면서도 그것에 압도되거나 동경하지 않았다. 그는 봉황산의 장엄함조차 “밝고 부드러운 기운이 부족하다”며 한양의 산들보다 못하다고 평가했다. 이는 단순한 미적 비교가 아니라, 조선의 자연에 깃든 고유한 기운과 품격을 감지하고 존중하는 자주적 인식의 결과였다.
그의 자연관은 외형의 아름다움에 머무르지 않고, 자연이 발산하는 기운을 읽어내어 사람과 나라의 정신적 근거로 삼는다. 이는 실학자로서의 합리성과 문인으로서의 감성, 그리고 조선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이 어우러진 연암 특유의 통합적 사유 방식이다.
오늘날 우리가 연암의 글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본질을 꿰뚫는 지성과 깊은 관찰력으로 자연과 인간, 조선의 미래를 함께 사유한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 우리의 자연과 공간은 우리 삶의 바탕이자 정체성의 중심이다. 조선 산하를 주체적으로 인식한 연암의 시선은, 곧 조선 사람과 조선 문명의 가능성을 굳게 신뢰한 한 지식인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