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인식방법 : 평등안 명심
1. 다시 책문 쪽으로 다가가서 책문 안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여염집은 대부분 높게 지은 오량五樑집이었는데, 지붕은 이엉으로 덮여 있다. 그리고 용마루는 높이 솟아 있었고, 대문은 가지런하다. 거리는 평평하고 곧아서 마치 길 양측을 따라서 먹줄을 친 듯하다. 낮은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길 위에는 사람이 탄 수레와 짐을 실은 수레들이 자유롭게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다. 길가에 쭉 벌여 놓은 살림살이에 쓰는 그릇에는 모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지금까지 보았던 물건들의 양식은 어디 하나 촌스럽고 투박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먼저 연경에 갔었던 내 친구 덕보德保 홍대용洪大容 예전에 나에게 이 나라는 “그 크기도 크지만,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도 아주 꼼꼼하고 세심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책문은 천하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곳인데도 이 정도라면 앞으로 구경할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의욕이 꺾여 여기서 그만 바로 발길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에 온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그 순간 문득 깨달으며 중얼거렸다.
"이것이 바로 샘나는 마음이구나."
나는 천성이 욕심이 없고 마음도 깨끗해서, 남을 부러워하거나 샘을 내는 마음은 본래부터 완전히 끊고 사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오늘 다른 나라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지금까지 본 것은 이 나라를 만 분의 일도 되지 않는데 벌써 이런 허망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것은 아마 내가 본 것이 적은 탓일 것이다. 만약 여래의 혜안으로 시방세계十方世界(온세상)를 두루 살핀다면, 어느 것 하나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세상 만물이 평등하게 되면 자연히 시기와 부러움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復至柵外, 望見柵內, 閭閻皆高起五樑, 苫艸覆盖, 而屋脊穹崇, 門戶整齊。 街術平直, 兩沿若引繩, 然墻垣皆甎築。 乘車及載車, 縱橫道中, 擺列器皿, 皆畵瓷。 已見其制度絶無邨野氣, 往者洪友德保, 甞言大規模細心法。 柵門天下之東盡頭, 而猶尙如此, 前道遊覽, 忽然意沮, 直欲自此徑還, 不覺腹背沸烘。 余猛省曰 「此妒心也。 余素性淡泊, 慕羡猜妒, 本絶于中, 今一涉他境, 所見不過萬分之一, 乃復浮妄若是, 何也。 此直所見者小故耳, 若以如來慧眼, 遍觀十方世界, 無非平等, 萬事平等, 自無妒羡。」
[해설]
연암은 청나라 국경의 작은 마을인 책문의 문물제도가 몹시 발달한 것을 보고 감탄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마음이 투심 때문이라고 자각한다. 연암은 스스로의 감정을 투妒(시샘, 시기)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조선 시대 언어 습관에서는 '투妒'가 '질嫉'을 포괄하여 넓게 사용되었다. 한문에서 종종 투妒가 질嫉보다 감정적으로 더 넓게 쓰인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남이 가진 것을 내가 못 가져서 생기는 부러움(Envy)을 '시기'라하고 ,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봐 생기는 불안(Jealousy)한 것을 질투라고 한다. 연암이 책문에 들어서며 중국의 풍요롭고 세련된 도시 모습을 보고 부러워한다. 이는 부러워하는 마음이다. 홍대용이 말하던 중국 문물의 섬세함이 현실로 체감되자, 자기도 모르게 화끈 달아오르며 의욕이 꺾이고, “그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처럼 연암의 감정은 타인이 가진 좋은 상태(중국 문명)에 대한 반응이지,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빼앗길까 봐 생긴 불안이 아니기 때문에 질투라고 할 수 없다. 그 당시 언어습관을 반영하여 투심이라고 했고, 번역하는 사람들이 질투심이라고 했다. 여기서는 질투심 대신 '시샘'이라고 번역했다.
연암은 "천성이 욕심이 없고 마음도 깨끗해서, 남을 부러워하거나 샘을 내는 마음은 본래부터 완전히 끊고 사는 성격이었다.|"라고 말한다. 부러움이 생길 때 자신을 성찰하여 노력하면 더 발전할 수도 있고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친 부러움 때문에 자존감이 저하되거나 시기 질투로 변질되어 자신을 갉아먹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시기와 질투심 때문에 때로는 무심코, 때로는 의식적으로 자신만의 잣대를 들이대며 우열을 가르고 옳고 그름을 재단한다. 이 과정에서 마음은 비뚤어지고 선입견과 편견은 쉽게 스며든다. 그러나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그런 굴레를 벗어나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본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이익준, 그리고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전혀 다른 시대와 공간에 살았지만, 모두 열린 마음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이익준은 의대에 들어올 때도, 졸업할 때도, 국가고시에서도 늘 1등을 차지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흔히 기대할 법한 오만이나 경쟁적 우월감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동기 봉광현은 “콤플렉스, 열등감, 선입견이 없다”라고 그를 평한다. 이익준은 의사로서 실력도 최고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진정한 품격을 보여준다. 그는 동료의 실수와 허물마저도 따뜻하게 감싸 안고, 환자와 보호자에게도 최선을 다하며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어 보인다. 그에게 사람은 성적이나 지위, 배경으로 평가되는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고 여긴다. 이익준의 열린 마음은 그의 태도에서 빛난다. 늘 웃음과 농담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료의 아픔과 환자의 고통 앞에선 누구보다 진지하다. 경쟁보다는 협력, 평가보다는 이해를 우선시하는 그는 병원의 위계적 문화 속에서도 자유롭게 살아간다. 열린 마음을 지녔기에 사람을 나누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으며,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연암도 중국의 선진문물을 보면서 부러움과 자신을 성찰한다. 연암은 자신이 본 것이 적은 탓이라며 자신의 견문이 좁았다고 인정하며 성찰한다. 연암은 석가 여래의 혜안으로 온세상을 두루 살핀다면 누구나 평등하지 않는게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또한 세상 만물이 평등하게 되면 자연히 시기와 부러움도 없어지게 될 것라고 말한다.
연암은 청나라 책문에 들어서며 조선의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청나라의 선진문화를 제대로 보고 듣고 배우고자 다짐한다. 청나라를 오랑캐라 생각하지 않고 열린마음으로 청나라 문화를 본질을 보려고 한다. 연암은 타인이나 선진 문물에 대한 열등감이 아니라 성찰을 통한 성장의 밑거름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려는 지성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2. 나는 장복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를 만일 청나라에서 다시 태어나게 해 준다면 어떻겠느냐?"라고 하니
장복은 "청나라는 오랑캐의 나라입니다. 소인은 싫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침 그때 소경 한 명이 어깨에 비단 보따리를 멘 채, 손으로 월금月琴(달모양 현악기)을 타면서 지나갔다.
나는 순간 크게 깨달으며
“저 사람이야말로 평등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진 이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조금 뒤에 책문이 활짝 열렸다. 방금 봉성장군과 책문어사柵門御史(책문감독관)가 와서 점방店房(가게)에 앉아 있다고 했다. 한 무리의 되놈들이 책문을 가득 메우면서 몰려나왔다. 그러고는 앞다투며 방물과 개인의 짐 보따리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대개 여기서부터는 만주족들의 수레를 고용해서 짐바리를 옮겨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수레꾼들은 사신이 앉은 곳에 와서 담뱃대를 물고 힐끗힐끗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서로 말했다.
"저 사람은 왕자인가?"
그들은 종실의 정사를 왕자라고 부르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정사를 알아본 자가 말했다.
"아니네, 저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은 부마駙馬(임금의 사위) 대인인데, 몇 년 전에도 왔었네."
그리고 우리 부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구레나룻에 쌍학 무늬의 관복을 입은 사람이 일대인乙大人이네."
서장관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사람은 삼대인山大人인데, 한림翰林 출신이지."
여기서 을乙은 둘째라는 말이고, 산山은 셋째라는 말이다. 한림 출신이라는 것은 문관을 말하는 것이었다.
顧謂張福曰, 「使汝往生中國何如。」 對曰 「中國胡也, 小人不願。」 俄有一盲人肩掛錦囊, 手彈月琴而行。 余大悟曰, 「彼豈非平等眼耶。」 少焉大開柵門, 鳳城將軍及柵門御史, 方來坐店房云。 群胡闐門而出, 爭閱視方物及私,卜輕重, 葢自此雇車而運也。 來觀使臣坐處, 含烟睥睨, 指點相謂曰, 「王子麽。」 宗室正使, 稱王子故也。 有認之者曰 「不是這個斑白的駙馬大人。 頃歲來的。」 指副使曰 「這髯的雙鶴補子, 乃是乙大人。」 指書狀曰 「三大人俱翰林出身的文官之稱也。」
[해설]
연암 박지원의 ‘평등안(平等眼)’은 참다운 앎의 자세이다.
1. 연암의 ‘평등안’과 ‘명심’: 선입견을 벗은 인식의 길
연암 박지원은 18세기 조선이라는 유교 중심 사회에서 감히 ‘보이는 것’의 한계를 지적하고, 보이지 않는 진실을 파악하는 인식의 전환을 시도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아홉 번 강을 건너며도 강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통찰을 통해, 감각적 인식의 오류와 선입견의 위력을 폭로한다. 그는 참된 인식은 감각이 아니라 ‘명심’, 즉 선입견 없는 차분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이러한 인식론은 단지 철학적 사유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소경의 눈’을 통해 외양이 아닌 본질을 꿰뚫는 통찰을 은유하였고, ‘평등안’이라는 불교적 개념을 차용해 조선과 청나라, 문명과 야만, 선인과 이단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했다. 이는 당대의 화이론(華夷論)을 극복하려는 시도로서, 타자와 세계를 차별 없이 바라보는 열린 마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2. ‘경계인’ 연암의 실천적 인식론: 진리 탐구와 현실 개혁
연암의 사상은 ‘관념적 평등’이 아닌 ‘실천적 평등’을 지향한다. 그는 상공업과 수레, 벽돌, 통상 확대 등 현실적 개혁을 제안하며 조선의 낙후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실천은 민중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려는 애민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상인과 역관 같은 민간 주체의 역할이나 신분제 개혁에 대한 언급은 다소 미흡하여,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지닌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암이 보여준 ‘경계인의 시선’은 그를 단순한 개혁론자가 아닌, 시대를 꿰뚫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그는 자타의 경계를 넘나들며,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통합적 진리를 탐구하였다. 김명호 교수와 박수밀 교수의 평가처럼, 그의 인식은 단순한 중용이나 절충이 아니라, 차별 없는 앎을 향한 철학적 실천이었다.
3. 혐오와 분열의 인공지능 시대, 연암의 평등안과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21세기 디지털 사회에서 인공지능(AI)은 인간의 정보 소비와 인식 형성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AI 기반의 추천 시스템은 개인의 선호를 분석하여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함으로써, 인간의 사고를 보다 폐쇄적이고 편향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 그 결과 ‘필터 버블(Filter Bubble)’ 현상이 심화되며, 사회는 상호 이해와 포용보다는 확증편향과 집단 극화로 치닫고 있고, 숙의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사유와 놀라운 접점을 가진다. 연암은 시대적 질곡 속에서 고정관념을 넘어서기 위해 ‘평등안平等眼’과 ‘명심冥心’의 태도를 강조했다. 평등안이란 선입견과 편견 없이 바라보는 안목이다. 명심은 감각적 경험이나 이미지를 벗어나 맑은 마음으로 존질을 꿰뚫어보는 마음이다. 이 두 가지는 인공지능 편향 시대에 우리가 취해야 할 참다눈 인식 자세로 주목할 만하다.
4. 인공지능과 인식 편향: 현대사회에서의 ‘폐쇄된 시선’
오늘날의 인공지능은 인간의 시야를 극도로 협소하게 만들고 있다. AI는 사용자의 검색, 시청, 클릭 데이터를 분석하여 선호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제공하는데, 이는 사용자가 편향된 정보만을 접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와 같은 개인화된 정보 환경은 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를 강화하며, 사회적 대화와 숙의의 토대를 붕괴시킨다. 알고리즘과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이로 인해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AI가 걸러낸 일면적 정보에 의존하여 세계를 인식하게 된다. 현대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의 인식 오류를 보완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조화하여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5.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맑은 마음으로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시야를 왜곡하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오늘날, 연암 박지원의 ‘평등안’과 ‘명심’은 단지 역사적 사유가 아니라 현재를 위한 대안적 인식론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했고,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며 진리의 본질을 파헤치려 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필터 버블 속의 편협한 인식, 진영 논리에 물든 판단, 혐오와 배제의 언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되새겨야 할 철학적 태도다. 편견 없는 열린 마음, 성찰적 의심, 진리를 향한 겸허한 자세는 연암이 말한 ‘장님’의 눈에서 비롯되며, 이것이야말로 현대 사회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마음의 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