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세대라는 신화, 내면에 숨겨진 거대한 기만
'586세대'라는 신화의 가장 거대한 기만은, 그것이 마치 하나의 단일한 운명 공동체인 것처럼 우리를 속여왔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 허구의 공동체에 메스를 대어, 그 안에서 기생하고 있던 두 개의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계급을 분리해 내고자 한다.
이 분리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1985년 스물다섯 살이었던,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두 명의 '김영수'를 소환해 보자.
첫 번째 김영수는 서울의 명문대 철학과 3학년이다. 그의 아버지는 읍내의 작은 공무원이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아들이 '딴생각' 않고 공부에만 전념할 환경은 만들어 주었다. 그의 자취방 책장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리영희의 저작들이 꽂혀있다. 낮에는 교정 잔디밭에서 시대의 모순을 격렬하게 토론하고, 밤에는 지하 써클룸에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동지들과 함께 불온한 유인물을 만든다. 최루탄 냄새는 그의 젊음을 증명하는 훈장이며, 언젠가 맞이할지 모를 구속은 그가 짊어져야 할 영광의 십자가다. 그는 스스로를 억압받는 민중의 일부라 믿지만, 그의 진짜 고민은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에 대한 관념적 고뇌다. 그는 역사의 주인이 되고 싶은 '혁명의 설계자'다.
두 번째 김영수는 열아홉 살에 상경해 구로공단의 봉제공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평생 농사를 지었고, 그에게 물려줄 것은 가난밖에 없었다. 그의 비좁은 벌집 방에는 책 대신 낡은 작업복과 파스 한 통이 놓여있다. 그의 하루는 새벽 통근 버스의 디젤 매연 냄새로 시작해, 밤늦게까지 돌아가는 미싱 소음 속에서 끝난다. 그의 유일한 낙은 월급날 동료들과 함께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이다. 그에게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이야기다. 그의 진짜 고민은 이번 달 월급으로 시골에 계신 어머니 약값을 보낼 수 있을까,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야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한 생존의 절규다. 그는 역사의 변두리에서 묵묵히 땀 흘리는 '산업의 엔진'이다.
이 두 명의 '김영수'는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대를 살았다.
통계청 자료와 인구분포도 속에서 그들은 '1960년대생, 80년대에 20대', 즉 '586세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인다.
이것이 바로 통계의 폭력이자 역사의 기만이다.
첫 번째 김영수, 즉 586 쁘띠 부르주아는 훗날 '민주화의 주역'이 되어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며, 교수와 언론인이 되어 "우리가 바로 586이다"라고 외쳤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경험을 세대 전체의 보편적 경험인 양 독점하고 신화화했다.
그 시간, 두 번째 김영수, 즉 586 프롤레타리아는 IMF 외환위기의 칼날 앞에서 명예퇴직을 당하고, 치킨집을 열었다가 빚더미에 앉고, 택시 핸들을 잡으며 "내가 이 나이에..."라고 한탄했다.
그들은 신화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친구를 자처했던 첫 번째 김영수들이 만든 세상 속에서 가장 먼저, 가장 고통스럽게 버려졌다.
'586세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두 개의 다른 계급, 즉 역사를 설계하고 기록한 '말씀의 상속자들'과, 그 역사의 동력이 되었으나 이름 없이 사라진 '침묵의 엔진들'이 있었을 뿐이다.
이 책의 목표는 명확하다.
허구의 공동체인 '586세대'라는 이름표를 찢어버리고, 그 이름 뒤에 숨어 우리의 아버지를 배신하고 착취해 온 바로 그 첫 번째 김영수들, 586 쁘띠 부르주아의 민낯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대 내의 '내전(內戰)'에 대한 기록이다.
한쪽은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그 주인공의 배경이 되어 사라졌다.
이제, 그 배경이 된 아버지들의 이름으로, 주인공들의 가면을 벗길 시간이다.
이 책에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 그리고 이 계급적 단절을 명확히 하기 위해, 전자를 '586 쁘띠 부르주아'로, 후자를 '586 프롤레타리아'로 명명하고 이후의 모든 분석을 진행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