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들의 생각'은 '우리의 상식'이 되었나
1987년 6월, 거리의 함성이 승리했다.
그러나 진정한 전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거리의 투쟁이 끝나자, 586 쁘띠 부르주아들은 화염병과 돌멩이를 내려놓고 더 강력하고, 더 지속적이며, 더 보이지 않는 무기를 손에 들었다.
그들은 이제부터 사회를 움직이는 생각과 가치, 즉 '상식'을 생산하는 거대한 기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헤게모니 기계'의 건설은 특정 개인의 치밀한 의도가 아니라, '투쟁 권력'을 독점한 하나의 계급이 자신들의 승리를 영속화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계급적 본능의 발현이었다.
거리의 물리적 투쟁이 끝나자, 586 쁘띠 부르주아들은 화염병과 돌멩이를 내려놓고 더 강력하고, 더 지속적이며, 더 보이지 않는 무기를 손에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쟁취한 '정의'의 독점권을 지키기 위해, 사회를 움직이는 생각과 가치, 즉 '상식'을 생산하는 거대한 기계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헤게모니 기계'다.
이탈리아 사상가 그람시가 말했듯, 진정한 지배는 총칼이 아니라 피지배자의 '자발적 동의'를 통해 완성된다. 586세대는 이 원리를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정권 교체를 넘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운영체제(OS)를 자신들의 코드로 다시 쓰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설득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자체를 바꾸려 했다.
그들은 더 이상 거리에서 싸울 필요가 없었다. 새로운 전쟁터는 국회, 언론사, 대학, 출판사, 영화사, 그리고 시민단체였다. 그들은 이 기관들을 점령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사회 전체에 퍼뜨릴 '담론의 생산수단'으로 삼았다. 이 과정은 명확한 설계도라기보다는, 권력을 장악한 계급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장해 나가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특정 단어에 권위를 부여하고, 특정 프레임으로 사고를 유도하며, 특정 기억을 집단적으로 강화했는가? 이것은 단순한 선전(Propaganda)을 넘어, 현실 자체를 재구성하는 '담론의 연금술'에 가깝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경험이라는 납(鉛)으로 '보편적 진리'라는 금(金)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모든 담론 투쟁의 출발점은 '단어'의 정의를 독점하는 것이다.
어떤 단어를 '선'으로, 어떤 단어를 '악'으로 규정하는가에 따라 전쟁의 승패는 시작부터 결정된다.
'개혁(改革)'이라는 신성불가침 영역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정치적 행위에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검찰, 언론, 교육, 부동산. 분야를 막론하고 그들이 손대는 모든 것은 '개혁'이 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는 '개혁에 저항하는 수구 기득권'으로 자동 규정되었다.
'개혁'이라는 단어 자체가 반박할 수 없는 선(善)이 되면서,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과 부작용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진보(進步)'와 '퇴행(退行)'의 이분법
그들은 스스로를 '역사의 진보'와 동일시했다.
그들의 노선은 곧 '진보'이며, 인류사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방향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단순히 다른 의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퇴행적' 존재가 되었다.
이 프레임 속에서 논쟁은 사라지고, 오직 '진보'를 따를 것인가 '퇴행'할 것인가의 선택만이 남게 된다.
'친일/독재 부역자'라는 궁극의 낙인
논쟁에서 불리해질 때마다 그들이 꺼내 드는 마지막 카드는 바로 이 '역사적 낙인'이다.
상대방의 주장과 논리를 반박하는 대신, 그의 사상적 뿌리가 '친일'과 '독재'에 닿아있다고 공격한다.
이는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상대방을 대한민국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는 '반역자'로 규정하여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사상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담론 설계의 핵심 알고리즘은 세상을 오직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는 '선악 이분법'이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도덕적 대결 구도로 재편함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쉽게 동원하고 적을 명확하게 설정할 수 있었다.
[민주 vs 반민주]: 그들의 모든 투쟁의 기본 구도.
[진보 vs 수구]: '반민주' 세력을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로 낙인.
[개혁 vs 반개혁]: '수구' 세력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다고 규정.
[시민 vs 기득권]: 자신들은 언제나 '시민'의 편이며, 반대자는 모두 '기득권'이라는 환상 구축.
[우리 vs 그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우리 편'과 '적이냐'의 문제로 환원.
이 알고리즘이 무서운 점은, 누가 '민주'이고 누가 '시민'인지를 정의하는 권력을 그들이 독점했다는 데 있다. 그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평범한 시민조차도, 이 알고리즘을 통과하는 순간 '기득권'이자 '반개혁 세력'으로 둔갑하게 된다.
그들이 구축한 역사관 속에서, 대한민국은 '친일과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영원한 투쟁의 과정에 있다.
87년의 승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며, '수구 세력'은 언제나 부활을 노리고 있다.
이 서사는 그들의 정치적 존재 이유를 영속화하고, 사회적 위기감을 조성하여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정치적 무한동력장치'로 작동한다.
이 투쟁 서사에서 '산업화'의 역사는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독재의 부산물' 정도로 폄하된다. '한강의 기적'을 일군 586 프롤레타리아(우리의 아버지들)의 땀과 희생은 '민주화 투쟁'이라는 거룩한 서사 뒤편으로 밀려난다.
오직 586 쁘띠 부르주아의 투쟁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역사로 기록된다.
가장 교묘한 기술은 물리적 강제가 아닌 심리적 통제, 즉 '부채의식'의 확산이었다.
그들은 절묘하게 '피의 대가'라는 감정적 청구서를 내밀기 시작한다.
"너희가 지금 누리는 민주주의와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우리가 감옥 가고 피 흘려 얻어낸 것이다"라는 말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다.
그것은 다음 세대에게 보내는 '감정적 청구서'이다.
이 청구서 앞에서, 후배 세대는 평등한 시민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수혜자'의 위치로 전락한다.
이는 비판을 '배은망덕'으로 치환할 수 있는, 도덕적 우월성을 점하게 된다.
이 심리적 위계질서 속에서, 586세대에 대한 비판은 논리적 반박이 아니라 '선배 세대의 희생을 모독하는 배은망덕한 행위'로 치부된다.
그들은 합리적 토론의 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자신들을 비판 불가능한 '도덕적 채권자'의 위치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이 네 가지 담론 설계 원칙은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의 '사상적 문법'으로 작동해왔다.
우리는 이 문법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세상을 판단하도록 길들여졌다.
586의 헤게모니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문법의 힘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건설한 헤게모니의 기계는 어떤 엔진으로 돌아가는지 살펴볼 차례이다.
헤게모니 기계의 가장 강력한 엔진은 언론이었다. 그들은 기자, PD, 칼럼니스트, 편집자가 되어 '진실'을 정의하는 권력을 손에 쥐었다.
그들은 단순히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민주 대 반민주', '진보 대 수구'라는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해석했다. 이 프레임 안에서 그들의 모든 행동은 '개혁'이 되었고, 반대자의 모든 행동은 '반동'이 되었다.
광우병 사태 당시 '뇌송송 구멍탁'이라는 비과학적 선동이 어떻게 '국민 건강을 걱정하는 양심적 목소리'로 포장되었는지, 조국 사태 당시 명백한 입시 비리가 어떻게 '검찰 개혁을 막으려는 수구 세력의 반격'으로 둔갑했는지를 보라. 그들은 사실을 보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프레임에 맞춰 사실을 재단하고 창조했다.
신문과 방송은 끊임없이 80년대의 투쟁을 미화하고, 그들의 동지들을 '양심적 지식인', '시대의 등불'로 포장했다. 그들의 과거는 신화가 되었고, 그들의 현재는 정의가 되었다.
장기적인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그들은 다음 세대의 머릿속에 자신들의 세계관을 심는 교육 시스템을 장악해야만 했다.
현대사 교육의 중심은 '산업화의 기적'에서 '민주화의 위대한 투쟁'으로 옮겨갔다. 교과서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는 오직 '독재자'라는 단면으로만 그려지는 반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과오가 삭제된 '민주주의의 성인'으로 묘사된다. 학생들은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586의 세계관을 암기하도록 강요받는다.
"너희가 누리는 이 자유는 우리가 피 흘려 얻어낸 것이다"라는 메시지는, 다음 세대에게 일종의 '도덕적 부채의식'을 심어주었다. 이 부채의식은 586세대에 대한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강력한 심리적 족쇄로 작동했다.
가장 교묘하고 효과적인 엔진은 문화였다. 영화, 드라마, 소설은 586의 투쟁을 딱딱한 이념이 아닌, 눈물과 감동, 그리고 '낭만'이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대중의 심장을 직접 파고들었다.
낡은 점퍼를 입고 고뇌하는 남자 대학생, 그를 지지하는 순수한 여자 후배, 잔혹한 고문 경찰, 비열한 안기부 요원... 이러한 전형적인 캐릭터들은 수없이 반복되며 대중의 무의식 속에 각인되었다.
최루탄 자욱한 거리, 불타는 화염병, 구호를 외치는 함성은 '폭력'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이자 '저항의 아름다움'으로 미학화되었다. 영화 <변호인>, <1987>, <택시운전사>와 같은 '천만 영화'들은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586의 영웅 서사를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로 각인시켰다.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며 팝콘을 먹는 동안, 비판적 사고 능력을 마비당한 채 '586 = 정의'라는 공식을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했다
헤게모니 기계의 윤활유이자, 가장 깊숙한 곳까지 영향력을 침투시키는 모세혈관. 그것이 바로 '참여', '연대', '정의', '환경'과 같은 거룩한 이름을 내건 시민단체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깨어있는 시민'의 대표로 자처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곧 '국민의 뜻'으로 포장했다. 소수의 활동가들이 '시민'이라는 이름을 독점함으로써, 그들의 아젠다에 반대하는 모든 개인과 집단은 '비시민적'이거나 '이기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민주화 이후, 이들 시민단체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프로젝트와 지원금을 받아 운영되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이 단체들은 사실상 586 쁘띠 부르주아의 정치적 외곽 조직이자, 그들의 이념을 사회 곳곳에 전파하는 '이념의 배급소' 역할을 수행했다. '공공의 선'은 그렇게 그들만의 '사적인 사업'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지난 30년간 대한민국 사회는 이 거대한 헤게모니 기계가 생산해낸 '상식' 속에서 살아왔다. 이 기계는 너무나 성공적으로 작동하여, 우리는 그것이 '기계'라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기계는 악의에 찬 몇몇 설계자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진정으로 '정의'롭고 '올바른'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권력을 독점한 계급의 비극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시야를 '보편적 진리'로 착각하고,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사회의 발전'과 동일시한다.
'민주화'라는 위대한 투쟁의 독점적 경험은 그들에게 "우리가 곧 정의다"라는 치명적인 오만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 오만함 위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가르쳐야 할 진리'로, 자신들의 역사를 '암기해야 할 성전(聖典)'으로 여기며 이 거대한 기계를 건설한 것이다.
기성세대에게 이토록 충격적이고 이해 불가능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 기계가 만들어낸 '상식'을 거부한 최초의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계의 생산품을 불량품이라 외치며, 이제 그 기계 자체의 전원을 내리려 하고 있다.
우리의 고발은 바로 이 '선의'의 얼굴을 한, 그래서 더욱 강력한 기계의 설계도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