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원색적인 순간을 담다
이모 저희 주문할게요.
식당에 가면 나의 음식 취향을 기억하고 알아서 주문해주는 너였다.
저희 물냉면 하나에 오이 빼주시고, 양념장 따로 주세요. 하나는 비빔냉면인데, 거긴 오이 넣어주셔도 돼요.
저희 양지차돌 쌀국수 두 갠데 하나는 양파 빼주시고 다른 하나에만 숙주랑 고수 많이 넣어 주세요.
저희 상하이 스파이스 버거 라지 사이즈에 양파 빼주세요, 음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는 베이컨 디럭스 토마토 버거 라지에 사이다로 주세요.
여우와 두루미가 친구가 되어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두루미를 초대한 여우는 납작한 접시에 국을 담아 대접했다. 그러나 뾰족한 부리의 두루미는 납작한 접시의 국을 먹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두루미는 여우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목이 긴 호리병에 음식을 여우에게 대접했으나 긴 부리로 음식을 꺼내먹는 두루미와 달리 여우는 먹을 수 없었다.
상호 배려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몰랐을 수도 있지만 겪어보기 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나와 다르면 "왜?"라는 궁금증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있는 그래도 인정해주는 것, 바로 존중이다.
어릴 적부터 오이를 유달리 싫어했다.
입안 가득 맴도는 오이 향과 식감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어릴 때 썼던 오이 오일 냄새로 느껴져 기성품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불편했다. 먹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처음 물어봐준 사람이었다.
우린 존중이라는 단어의 뜻을 대략적으로 어떤 것인진 알지만 막상 구체적인 뜻에 대해 뭐냐고 물었을 때 섣불리 대답이 나오질 않는다.
내 인생에서 어쩌면 재방송은 없다.
존중을 영단어 그대로 해석해보면 "다시 보기"이다.
말 그래도 존재를 중요하게 여기고 다시 한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타인을 인정하고 원활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이자 방법이다.
어느 정도의 "왜"라는 궁금증도 필요했다.
이 또한 하나의 과정이니까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싫은 것까지
너는 참 궁금증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 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인지, 왜 그런 기분인지 등 참 다양했다.
조형 과목 교수님께서 항상 평면이 아닌 입체적으로 물체를 바라보기를 지도해주셨다.
말씀하신 다각적 시각이 여러모로 중요했다. 이는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놓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차분히 기다리고 들어주다 보면 애정 하게 되기도 했다.
존중의 시작은 나 자신을 유지하되 상대방 또한 같이 높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면 보이는 시점이 달라진다.
그래서 관계를 위한 대우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존중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이라면 존경과는 유사하면서 달랐다.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러한 상대에 배울 점을 느끼고 간다는 것이다.
존중은 상대를 받아들이는 다소 수동적인 자세라면 존경은 그런 상대로부터 배울 점을 본받는다는 적극적인 자세가 아닐까 싶다.
많은 작가들의 소재가 되고 화자 되었던 높이 받들어 우러러보는 뜻을 가진 "추앙"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존중의 가치를 알고 실천하고 있는 그 사람을 존경하기로 했다. 나는 그런 널 추앙했고 그렇게 스며들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