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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중 나머지 네 종류의 복받은 사람

1인칭 시점으로 전개하는 에수 스토리

<八福 중 다섯째>

내가 본 이스라엘에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없었다.


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루는 그 시간에도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라고 논하고

태어나면서 시력을 상실한 사람 앞에서

"이 사람이 시각장애를 겪는 것은

부모의 죄 때문인가?

본인의 죄 때문인가?"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혼인을 하고 좋은 일이 있어서

잔치를 베풀어 손님을 초대하여도

함께 기쁨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


"자기만 좋으면 대수인가?

뭘 그런 것을 동네방네 소문내고 그래? 짜증나게!"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못하는 세상.


이들의 관심은

오직 율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리라.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소위

탈리오의 법칙

(Lex Talionis)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려고 하지만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간음하던 여인을

남자 일행이 내게 데리고 왔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찌할 셈이요?"


저들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소위 열이 많이 오른 모양이다.


화가 가득한 이들의 특징은

들을 귀가 닫혀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땅바닥에

돌로 낙서를 했다.


저들이

들을 귀를 가질 수 있을 때까지

분노가 가라앉고

조금이라도 이성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기다려야 했다.

"아니 이들이 그 현장을

어떻게 알았을까?

본인들도 그 현장에서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여인들 두고 서로에게 시기하고 있는가?

결국 이들은 자신의 불의를 감추기 위해

이 여인을 희생물로 삼는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이들은 그제서야 여인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 누구 하나

과감하게 돌을 던지지 못했다.


돌을 누구에게 던질 수 있을까?

정작 긍휼이 필요한 자는

자신임을 조금씩 알게 되리라.


나는 여인에게 말했다.

"너를 정죄한 자가 있느냐?

나는 너에게 긍휼을 베푼다.

나는 너의 아픔을 안다.

나는 너를 참으로 불쌍히 여긴다."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군가를

긍휼하게 바라보는 자

불쌍히 여길(ελεημονες)줄

아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긍휼함을 입을 수(ελεημονες) 있기 때문입니다.


동정(同情)은 아주 바람직 합니다.

동정하기를 꺼려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의 아픔에 같은 마음을 갖고

이웃의 기쁨에 함께 기뻐할 수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율법만이 지배하는 세상

규칙으로만 다스리는 세상

특히 다른 사람에게만 법률 적용을 하고

그 법으로 심판하려는 사람만이 가득한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 긍휼히 여김, 배려"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사랑이다.

<八福 중 여섯째>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하나님을 볼 수 있나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가?

사람들은 스스로 모순을 갖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기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하고

보이지 않아야 신(神)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서

신(神)을 인간의 눈으로 확인하려는 시도를 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 모순을 해결한 방법은

역설(逆説, Paradox)이다.


하나님인 내가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온 것이다.

나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만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pure heart) 이요,

청결한 눈이다.

즉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사람을 창조했다.

사람은 신을 닮았다(God-like).

하나님은

사람을 -그 누구이든 간에- 통해서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다.


사람은

사람의 생명은

그토록 거룩하고 존귀하다.


이 사람을

단지 물질의 결합(a combination of matter)

혹은 오늘 왔다가 사라져버리고

영원하지 않는 일시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그렇게 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나를 통해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자

마음이 청결하지 않는 자는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나를 보면서도

단지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는 젊은이로만 바라볼 것이다.


나에게서 하나님을 보았는가?

그대는 이미 행복한 자니라.


<八福 중 일곱째>

여기저기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부부는 등을 지고 사는 지

꽤 오래 되었다고 한다.

갈등과 대립이

하루도 멈추지 않는 전쟁의 소문.


"이 땅에 평화란 존재하는가?

평화가 오기는 하는가?"

사람들은 이구동성(異口同声)으로 말한다.

"세상에는 평화가 없어요 포기한 지 오래되었어요."


기득권(既得権)을 누리는 자들은 읖조린다.

"지금보다 더 평화로운 세상이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이 너무 부정적이야!"


저들에게는

식탁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는 자들의 신음소리가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구나."


회칠한 무덤같이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불의한 갈등을 이용해

자신만의 이익을 유지하려는

주검이 썩는 냄새가 코끝에 진동하는구나"


나는 저들에게 말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평화란 굽어진 것이 곧게 펴지고

울퉁불퉁한 길이 평평해지고

어그러진 것이 올바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화평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나는 궁극적으로

화목을 위한 제물(Sacrifice)이 될 것이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Peacemaker)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세상이 말하는 그런 평화가 아니다

세상이 전혀 줄 수 없는 평화를 말한다.


이 평화를 위해서

나는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

행복의 절정을 누릴 것이다.

각자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를 지는 그대여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늘이 주는 행복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八福 중 여덟째>

젊은이들이 묻는다.

왜 이 시대는

악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성공한 사람의 본보기처럼 행세를 하는가?


왜 세례요한 같은 의인은

감옥에 있어야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악한 헤롯에 의하여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이러한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나는 이들의 고민과 번민에 100% 이상 공감했다.


아삽이란 사람도

악인의 형통에 대하여 깊이 고민했지.

"악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고난이

악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악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악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악인들의 눈이 솟아나며

악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악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악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악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아삽은

의인이 당하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같이 고민했어.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세상이 선하기에

칭찬하고 격려하기 위함이 아니다.

세상을 악이 지배하고 있기에

세상 사람들이 악에 치우쳐 있기에

이로 인하여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일이

계속되기 때문이지.

그러나 이것은 알아야겠지

핍박을 하는 자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핍받을 당하는 자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폭력을 가하는 자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폭력을 당하는 자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빼앗는 자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빼앗기는 자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고소하는 자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자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비웃는 자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포용하는 자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는 자가 행복하고

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는 자가

행복의 참된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나의 이름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자는

도리어 즐거워하고 행복해야 할 것을.


그 이유는 역사가 시작되고,

과거에도 선지자는 핍받을 당했고 이후에도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의인은 고난을 당할 것이다.


마지막 날까지

악은 더욱 강하게 힘있게 의인을 없애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악이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핍박당하는 위치에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한 존재이니라."


나는 앞으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고소를 당하고

핍박을 받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내하리라.

그래서 나는 행복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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