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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에서 만난 사람(1)

1인칭 시점으로 전개하는 예수스토

<베데스다에서 만난 사람-1>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나는 예루살렘으로 이동했다.

예루살렘 양문(羊門) 곁에 베데스다(βηθεσδα, בית חדתא)란

연못이 있다.

이는

Beth hesda (בית חסד/חסדא)

즉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연못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면,

어떤 병을 앓고 있던 간에

연못에 제일 먼저 뛰어드는 사람들은 완치된다는....

이 전설을 믿고

중증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

당시의 의학기술로

해결이 안되는 사람들(不治病者),

게다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연못이 움직이면

내가 제일 먼저 뛰어들리라.”는

다짐을 가지고.

문제는 이곳에서도 경쟁이 있고,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


대부분이 중증(重症 )이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연못에 뛰어들 수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의지하는 방법

밖에는

달리 좋은 수가 없어서

대부분은 연못이 움직이는 현상을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베데스다 연못 가까이 다가가니

별로 깨끗하지 않는 냄새가

코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단지 사람만 모여있는 곳이

아닌 것 같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이 곳에는 빈곤의 냄새가 가득하다.


목욕은 물론

청소도 제대로 하지 않았겠지.

치유받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왔지만,

오히려 절망을 숙명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남았겠지.

나는

베데스다 연못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은

움직여도 자신과 상관없는

연못만을 응시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지만,

전혀 요동이 없다.


사람이 다가가도

“나와 무관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럴 거야.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렇게 지내왔을까?

어떤 사람은

치유 불가능

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부터

이곳에 왔겠지.


게다가

치유 조차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엇이 남아있을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지.

내 안에 있는 절망이란 단어도

이미 낯이 익었는데,

그런 또 다른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 연못에서 터주대감처럼

좋은 자리에 누워있는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누군가

그에 대한 정보를 나에게 준다.

38년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말했다.

당신은 낫기를 원합니까?

당신은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기를 바랍니까?”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했다.

그래도

“네 낫기를 원합니다.”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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