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이 너무 두껍고 길어서

아 나는 속았다.

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시간표를 받는 순간부터

"나는 속았다."고 느꼈습니다


그 이유는

진학반(進學班)이

1학년에 배치된 것이 아니라

3학년 일년동안만 배치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남들은 삼년동안 대학진학을 위해

목숨걸고 공부하는데

학원도 가고 과외도 하는데

나는 단일년 아니 단십개월동안만

공부를 해야한다니.


사실 진학반에 대한 정보는

아버지께서 전해준 것이니까

학교를 향해 불평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부터 다른 친구들과 함께

상업관련 공부를 해야했어요.


그 과목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있었다.

"주판, 타자, 펜글씨, 부기(簿記)"였죠.


앞의 세과목의 공통점은

"단지 손"으로 하는 "단순작업"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소아마비로 인해

두다리에 힘을 상실했어요.


그러나 두손과 두팔의 기능은

전혀 문제가 없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하는 단순동작과 반복에 의한

위의 과목은 나에게 매우

힘들고 어려운 과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주판은 난관이었어요.

고급주판을 구입하기에는 돈이 없어서

가격이 저렴한 주판을 구입했어요.

이 주판은 주판알 하나를

검지손가락으로 튕기면

두알이 움직이고

손가락이 두텁고 긴 나에게는

주판알 하나를 올리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림만 못그리는 줄 알았는데

주판을 튕기는데 내 손가락은

불편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당시 내가 다루게 된 타자기는

수동식이었지요.

가끔 전동 칼러(비록 검정/빨강 색뿐)타자기를

조작하기에는

내 손가락과 두뇌회전은

올바른 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 나는 다리에 힘이 없는데

손으로 하는 일에

무능함을 겪어야 하는가?"


마지막 펜글씨는 나에게

가장 정복하기 어려운 난공불락 분야였지요.


나의 글씨체는 용비체(龍飛體)입니다.

나는 글씨를 빨리 써내려 갔습니다

선생님께서 칠판에 판서(板書)를 하시면

나는 선생님이

분필을 칠판에서 떼는 순간,

나도 노트에서 볼펜을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더욱 중요한 사실은

내가 쓴 글을 잘 읽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글씨를 빨리 써내려 가다보니

글씨가 날라가는 거에요.

노트 한칸에 표현되는 글씨체가

글자 하나하나가 각기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펜글씨라니.

펜글씨도 급수가 있어서

일정급수를 획득해야 합니다.


펜에다 잉크를 묻혀서

하얀 노트에 작은 흔적을 남기게되면

지나간 자국에 글씨가 남아있겠지요.

하지만 글씨가 아니라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이때 펜글씨 선생님께서 저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

"글씨를 쓰라고 하니까

글씨를 잘 그리는구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