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내의지와 무관하게
약속날자와 장소가 정해졌다.
약속을 파기(破棄)하던가 지키던가
나에게는 단 두갈래 길만 남아있었다.
늘 그리했듯이
나는 점심식사도 거른채
약속시간보다 삼십분 일찍 다방에 와서
그녀를 기다렸다.
동대문시장을 바라볼 수 있는
길거리에 자그마한 다방이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다방문을 열고
입구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좌석을 찾아 앉았다.
그녀도 나의 얼굴을 알지 못할 것이기에
나는 나의 상징인 목발을
가슴 앞에 곤두세우고 자리를 잡았다.
"과연 그녀의 앞모습은 어떠할까?
그녀는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그녀는 어떤 생각으로
나와 만날 생각을 했을까?"
다방은 요즘 카페와 전혀 달랐다.
퀘퀘한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조명이 꽤 어두웠다.
이 장소를 정한 것도 그녀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 다방의 분위기에 대해
익숙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정면에 있는 다방입구로 들어오는
햇빛이 그나마 다방은 운치를 살려주었다.
삼십분은 결코 짧지않은 시간이었다.
손님도 적은 다방 안은 조용했다.
가끔 차를 마시고 떠나는 사람,
문을 열었다가 고개를 들고
다방 안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간헐적으로 보일 뿐
다방 벽에 세워둔 궤종시계의 초침만이
크게 귓전을 메아리칠 뿐이었다.
심지어 그녀를 보려고 목을 길게 뺀
나의 코를 통해 내쉬는 호흪이
거칠게 느껴질 정도였다.
드디어 약속된 시간이 되었다.
다방 문이 열리고 단아하게 차려입은
여성 한분이 한손으로 입을 가린 채
다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거침없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척 하면서
"네 안녕하세요 기다렸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한마디한다.
"♧♧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해서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녀의 말은 단호했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나를 만났던 여성들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멀리서 오셨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도 차는 한잔 들고
통성명은 나누고 일어서야겠지요.
♧♧얼굴을 봐서라도."
첫 만남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