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적산가옥(敵産家屋)에서 (3)

물로 배를 채운 아해들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지만

전쟁 후유증을 경험하는 일은

적산가옥에서 어린시절을 지내고 있던

아해들에게는 일상이었다.


이북(以北)에서 피난을 내려와

부산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고향인 황해도(黃海道)를

바라볼 수 있는 한양(漢陽)으로  

거처를 옮긴 부모덕분에

나는 서울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피난민(避難民) 수용소 같은

적산가옥에 잠자리를 정하고 

정착민(定着民)이 되었다.


적산가옥에서의 삶은

내 선택 밖의 삶이었다.

요사이 말로 표현하자면

슬럼가의 삶과 다름없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달동네,

김홍신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꼬방동네"의 삶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행복했다.

자유가 있었고

이보다 나아지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공부해라"는 말은 없었다.

 "건강이 최고야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이 말만 듣고 자랐다.


참고서, 문제집, 과외나 학원은

외계인들의 언어였다.

"저 아저씨는 무엇을 하시길래

 저렇게 배가 나왔지?"

먹을 것이 없어서 늘 홀쭉한 배만 드러내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낯선 현상이었다.


그래서 아해들은 이런 놀이를 했다.

한여름 땀으로 온 몸을  적시도록

뛰어놀던 아해들은

하나둘씩 수돗가에 모였다.

그리고는 수도꼭지에 입을 댔다.

"내가 먼저 먼저할께"


숨도 쉬지않고

맹물을 빈속에 그득 채웠다.

그리고 나서 서로 홀쭉한 배를 내밀었다.

"내  배가 더 빵빵하지?"


물로 채워진 배를 내밀면서

아해들은 서로 자랑한다


마치 아프리카 난민들의 아이들이

배만 볼록 튀어나온 채

허기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광경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Baby Boomers Era.

바글바글, 왁자지껄, 우당탕탕.


이렇게 자란 우리들이

사장도 되고

교수도 되고

목회자도 되고

정치인도 되고

과학자도 되고

아버지 어머니가 되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되어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

70을 바라보는 시절이 되었다.


적산가옥.


이곳이 무질서한 듯, 질서가 있고

혼돈스러운 듯 절제가 있고

방임한 듯 애정깊은 돌봄이 있엏다.


이젠

나이도 들고

먹기도 많이 먹고

기운도 떨어져

원하지 않게 나온 배를 안고

노후의 자유를 누리는 시대를 산다.


얼마남지 않은 시간을

쪽같이 여기며...

작가의 이전글 적산가옥(敵産家屋)에서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