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살기가 아무리 팍팍하다고 해도 예전에 비하면, 아주 옛날에 비하면 풍요로워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살기가 어렵다는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 라는 말을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세대이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 라는 말은 아주 옛날 우리 부모님 세대에 먹을 것이 없는 보릿고개를 겪으며 아무리 찾아보아도 먹을 것이 없으니 별수 없이 나무껍질이나 나무뿌리류를 먹어 주린 배를 채우다 나온 말이다. 제대로 소화될 리 없는 그것들이 그대로 배설될 때 그곳이 정말로 찢어지는 경우가 생겨서 이런 슬픈 말이 나왔다고 한다.
얼마 전에도 가족끼리 둘러앉아 밥을 먹다가 밥상머리에서 살짝 반찬투정을 하는 딸아이에게 밥상에 어울리지 않는 방금 언급한 신체부위를 말한 적도 있었다. "밥 먹는데 엄마 너무 해~" 하고 결국은 엄마의 매너 얘기로 끝이 났지만 난 가끔 1950년대쯤의 어려운 시절을 간간히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준다. 물론 나도 그 시절을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요즘 사람이지만 책에서 접하고 영화에서 보았던 어려운 시절이 너무 안타까웠다. 또 아이들에게 가끔 이야기해주는 것도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 아이들은 용돈이 따로 없다. 용돈 쓸 일이 없으니 굳이 주지 않는다. 학교를 오갈 때 픽업을 내가 하고 방과 후 배우는 곳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돈을 꺼내 지불할 일이 전혀 없기도 하고 돈이 있어봐야 불량식품을 사 먹는 것이 마음에 안 내키는 탓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도 욕구 충만한 사람인지라 가지고 싶은 게 참 많다. 장난감도 갖고 싶고, "다꾸"라고 불리는 다이어리 꾸미기의 각종 아이템도 갖고 싶고 나름 사고 싶은 게 참 많을 나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은 바로 칭찬통장!
용돈 대신 칭찬통장을 하나씩 만들고 50개 혹은 100개를 모을 때마다 본인들이 원하는 물건들을 하나씩 선물해 주기로 했었다. 어차피 칭찬통장이란 걸 하지 않아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엔 사주게 되어 있다. 한데 이런 식으로 일종의 약속을 하게 되면 아이들 스스로가 알아서 도장을 받기 위해 알아서 찾아서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을 하니 부모 된 입장에서 안 할 이유가 없다.
지난 주말 막둥이가 책을 미친 듯이 읽었다. 온종일 영상만 보라고 해도 볼 아이가 책이라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생각을 하던 중인데
"아~~ 다 읽었다~"
하며 칭찬통장을 가지고 왔다.
"엄마~ 칭찬통장이요~ 도장 10개 부탁드려요~"
"으응? 10개나? 왜에?"
" 10권 읽었거든~"
10개를 다 채우면 마지막 동그라미 부분에는 선물을 받게 되는 칸이다. 그럼 그렇지 네가 이상하리만큼 책을 열심히 읽더라 싶은데 너무 쉽게 얻는 느낌이 없지 않다. 책을 보아하니 동물도감, 식물도감 류의 책이라 거의 절반은 사진으로 가득 차 있어 글자 수도 별로 없고 말이다. 그래서 난 10개가 아니라 7개만 동그라미를 친다. 그랬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아들이 얼른 이의를 제기한다.
"응? 왜 10개 아니고 7개야? 책 한 권당 한 개라며~"
"으응~ 요즘은 세일 기간이라 10개에서 3개 세일해드렸어요~"
"으응??? 아니 그게 뭐야~~~"
ㅋㅋㅋ 엄마는 다 계획이 있지~ 속으로 혼잣말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한다.
"학교에 가져갈 독서록 해야지? 독서록 하면 나머지 3개 해 줄게~^^"
하고 칭찬통장이지만 흥정이 들어간다. 아무리 글자가 얼마 없어도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책을 10권이나 읽는다는 건 힘이 드는 일이다. 나름 고단해서 이제 좀 쉬어볼까 했는데 바로 독서록이라니 하기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수상한 말을 한다.
"엄마~! 독서록은 나쁜 거야~!"
"으응?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으응. 학교에서도 칭찬통장이 따로 있거든~ 근데 독서록을 하면 선생님이 칭찬통장에 도장 찍어주시는데
그거 도장 다 맡으면 과자를 준단 말이지? 과자를 먹으면 어떻게 되겠어? 이가 썩겠지~?!
그러니까 나쁜 거라고."
"뭐라고오??? ㅋㅋㅋㅋ"
뭔가 논리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고작 초3밖에 안 되는 아이한테 말리는 느낌이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정신을 차리라구!
엇! 근데 옆에서 막둥이 요놈 스스로도 자기가 한 말이 웃긴지 배시시 웃고 있다. ㅎㅎㅎ
요 녀석 다 컸다. 엄마한테 이상한 논리로 응수를 다 하고... 하마터면 논리에 넘어갈 뻔했다.
"그 과자 받아서 엄마한테 주렴. 엄마 과자 먹고 싶어~"
그러자 아들은 더 이상 방법이 없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털레털레 독서록을 쓰러 갔다. :)
풍족하게만 산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부족한 것도 느껴보고 아쉬움도 겪고 자라서 혹시 나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타인을 만났을 때 이해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타인까지 가지 않더라도 혹여나 스스로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좌절하지 않고 힘내어 일어날 수 있는 우리 아이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