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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Feb 21. 2023

이별이 오기 전까지 널 아껴줄게

커피포트의 딸깍 버튼

며칠 전 커피포트가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2년쯤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던 커피포트는 몸체가 투명한 유리 재질이고 On스위치를 누르면 빛을 머금은 파란색이 쫜 들어오는 것이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끓일 때마다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었다.



처음엔 유리재질이라 선뜻 구입하기가 망설여졌었다.

예전에 냄비를 한 번 태워먹을 뻔한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 무엇에 그리 집중하느라 신경을 못 썼는지 냄비 안에 있던 물이 한 방울도 안 남을 때까지 냄비는 가스 불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발이 없어 도망도 못 가고 입도 없어 뜨겁다고 소리 지르지 못한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유리뚜껑을 재빨리 열어줘야 했는데 간신히 잡고 싱크대 물이 담긴 설거지통에 던지듯 놓았다가 유리가 스르르 녹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녹았기 망정이지 만일 매우 차가운 물이었다면 뜨거운 유리는 온도차를 못 이겨 사방에 튀듯 깨져버렸을 것이고 아마 내 몸 어느 한 군데는 심하게 상처가 났을 거란 생각으로 아직도 아찔하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난 냄비뚜껑 유리만 봐도 유리가 겁이 나버렸는데 이번에도 유리재질이라 좀 무서웠지만 뽐내듯 뿜어져 나오는 파란 불빛에 홀려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가 결국 결제를 홀랑 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지 어느 날 포트 안에 하얀 가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열되는 전기제품인 경우 하얗게 뭔가가 일어나는 것이 보이면 구연산으로 청소를 해줘야 한다는 것을 어디서 본 적이 있어서 몇 차례 청소를 해주긴 했는데 이번엔 좀 상태가 달랐다. 눈을 게슴츠레 납작하게 뜨고 유리 안을 노려보았는데 이런... 청소문제가 아님을 발견하고 말았다.

 


포트 위 플라스틱 뚜껑이 문제였다.

그러고 보니 파란 불빛에 현혹된 내 눈은 물이 팔팔 끓는 100도의 수증기가 바로 닿는 뚜껑의 재질까지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예 생각을 안 했다기보다 판매 회사를 철석같이 믿은 것이 불찰이었다. 플라스틱처럼 보이지만 130도 정도의 내열성을 당연히 가진 재질이겠거니 설마 100도쯤이야 견디는 것이겠지 하며 포트의 플라스틱 뚜껑을 믿었던 것인데 마음먹고 꼼꼼히 다시 살펴보니 나 혼자만 맹신했던 그건 한낱 플라스틱일 뿐이었다. 펄펄 끓어오르는 수증기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삭아버렸고 가루가 되어 포트 안에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 내리는 중인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 내가 발견하기 전에도 떨어져 내린 가루는 물 안에 있었을 것이고 나는 또 "커피는 믹스지~" 하며 맛있다고 얼마나 호로록 먹어댔을꼬. 몰랐을 땐 그냥 모르고 먹었지만 알고 나니 얼마나 께름칙했는지 모른다. 모르고 먹을 땐 꿀맛이었다가도 후에 그것이 해골에 담긴 빗물이라는 걸 알고는 기겁했던 원효대사처럼...



맥가이버 남편은 내가 이 사실을 얘기하자마자 커피포트의 뚜껑을 뜯어버렸다. 그의 손은 원래 거침이 없었다. 가습기를 청소해야 하는데 분해가 안 되는 상부가 거추장스럽다고 가습기 뚜껑도 뜯고, 욕조 아래도 청소가 필요하다며 욕조도 뜯었다. 뜯기만 하는 건 아니다. 어쩔 땐 책수납장이 필요하다며 수납장도 만들고 심심할 땐 세탁소 옷걸이로도 뭘 그렇게 뚝딱뚝딱 만들어 내는데 선수다. 통통해진 나의 몸이 좀 망가진 것 같다며 나를 뜯지 않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할 판이다.



이번에도 어찌 손을 쓰겠지 싶은 마음에 맡기고 자리를 피해 주었는데 잠시 후 커피포트는 결국 뜯겼다. 최소한으로 남겨진 뚜껑에는 포일이 덮여있었고 다행히 연명치료는 성공한 모습이었다. 보기에 썩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주로 남편과 나 둘만 이용하는 것이니 물이 끓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실용적인 우리는, 조금 아파 보이는 포트의 모습에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파란 불빛은 여전히 빛났으니까.



방금도 커피를 마시려고 포트에 300밀리나 될까 하는 물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역시나 밝고 푸른빛은 나를 즐겁게 해 주었고 잠시 보다가 끓기 전까지 찰나의 시간도 아까워 잠시 책을 보느라 앉아 있었다. 책을 좀 오래 보아도 상관이 없다. 팔팔 끓으면 자동으로 딸깍 하며 버튼이 off 상태가 될 것이니 말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읽고 포트를 살짝 쳐다봤는데 어~! 뭔가 이상하다! 포트 안에 물이 하나도 없다! 분명 물을 넣었는데? 아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그리고 푸른빛은 계속 들어와 있다. 큰일이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슬라이딩하여 포트에 도착하자마자 버튼을 off 시켰다.



으윽...

하마터면 냄비에 이어 포트까지 홀라당 태워먹고 불까지 나는 참사를 겪을 뻔했다.

포트 안을 쳐다보니 '너 물이 아까 담기긴 담겼던 거니?' 하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물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아슬아슬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아니 도대체 왜? 분명 내가 넣은 물은 그 짧은 시간 다 어디로 간 거지? 이해가 안 가 이리 보고 저리보고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 아뿔싸...

남편이 뚜껑을 떼어버릴 때 물이 어느 정도 끓으면 자동으로 딸깍 소리가 나며 off로 전원을 자동 차단하는 버튼 연결고리마저 다 뜯어버린 걸 내가 뒤늦게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포트에 담긴 물이 다 끓어오르고 수증기로 변해 사라질 때까지 버튼은 off로 바뀔 줄 모르게 된 것이었다.



하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딸깍 버튼은 정말 소중한 것이었구나.

사람에게도 딸깍 버튼이 있다면 어떨까. 부글부글 화가 나서 스팀이 들어올 때 도저히 이 스팀이 빠져나갈 기미가 안 보일 때 스스로 제어하는 딸깍 버튼이 딸깍 하고 전원을 꺼주면 펄펄 끓었던 물이 어느새 잠잠해지는 커피포트처럼 화가 알아서 스윽 가라앉을 텐데.



이제 우리 집 커피포트는 제 스스로 끄는 법을 잊어버렸으니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물이 펄펄 끓는 시간이 매우 짧은 편이라서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잠시라도 한눈을 팔다 보면 금세 안의 물은 바짝 말라버리고 순식간에 타버린다. 난 옆에서 내내 지켜보며 서 있다가 팔팔 끓어오를 조짐이 보이면 속으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그리고 딸깍하고 수동으로 바뀌어 버린 딸깍 버튼을 검지손가락으로 눌러준다.



나도 내 가족들도 어느 순간 스스로 제어가 안 되는 순간이 오겠지. 화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끝까지 화가 치미는 날이 올지도 모르고 어느 날은 눈물이 온통 나를 집어삼킬 듯 우울한 날이 계속 이어지는 날도 올 것이고. 그런 슬픈 날들을 기대하고 또 기다리는 건 아니지만 항상 밝은 날만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루 앞날을 모르는 게 인생이니까.

그땐 수동이라도 좋으니 딸깍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눈에 보이게 제작되어 머리 정수리에 척 붙여 켜고 끄게 만들어진다면 참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나는 너에게, 또 너는 나에게 딸깍 버튼이 되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뚱딴지같은 생각을 해본다.

어느새 티스푼은 커피가루를 모두 녹여내었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커피는 나를 유혹하듯 달콤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출처.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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