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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Aug 29. 2024

콩나물 봉지를 패대기친 남편


냉장고 문을 열고 오늘은 또 어떤 음식이 썩어가는 중인가 매의 눈으로 살피던 남편은 안쪽 깊숙이 들어가 있어 하마터면 못 볼 뻔했던 콩나물 봉지를 잡아 쑥 꺼낸다. 더러운 것을 잡을 때처럼 봉지 맨 위 모서리 끝만 겨우 잡고 빙그르르 돌려 휙 보더니 썩고 무른 콩나물에서 즙을 짠 듯 누런 국물이 아래에 모인 꼴을 보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화를 주체할 수 없어 콩나물봉지를 자신의 키보다 높이 들어 올리더니 거실 바닥을 향해 힘껏 패대기를 쳤다. 봉지 안에 채워진 공기는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를 오롯이 받아 바닥에 철퍼덕 소리를 냈고 바닥에 닿는 것과 거의 동시에 봉지는 그만 퍽하고 터져버렸다. 그 안에 썩어가는 콩나물과 콩나물에서 나온 누런 즙은 거실 곳곳으로 사방팔방 튀어버렸다. 그 꼴을 본 아내는 아악!!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지금 뭐 하는 거야!' 하고 몸 밖으로 외칠 수는 없었다.

남편은 이미 냉장고 정리하란 말을 수차례 했고, 그중 마지막 말은 경고라는 걸 알았으니까.

남편의 인내심이 한계점을 넘은 걸 아내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워킹맘이던 지인이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다며 내게 한탄하듯 쏟아낸 이야기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요리를 하나 둘 해보다 재미가 들려버린 남편이 거의 모든 음식을 담당하게 되자 좋은 점이 생겼다. 남편이 요리를 맡으니 나는 요리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아도 된다는 그 자체가 가장 큰 장점인데, 그에 못지않게 자잘하게 좋은 점이 또 따라붙었다. 그건 바로 냉장고에 쟁여놓은 음식들이 상해버렸을 때다.


혹자는 먹을 만큼만 음식을 하고, 그때그때 처리하면 음식이 왜 상하겠느냐 겠지만, 개인마다 사정이 있듯 집집마다 이유도 있는 법. 재료가 이제 곧 상하게 생겨 큰맘 먹고 그전에 모두 먹어보겠다고 적정량보다 양을 많이 하게 될 때도 있고, 오늘 먹을 땐 분명 너무 맛있었는데 다음 끼는 그다지 내키지 않아 냉장고에서 아예 꺼내지 않을 때도 있고, 시댁에서 보내주신 음식 양이 너무 많아 다 처리하지 못하는 때도 있고, 때로 외식을 할 일도 생기면 냉장고에 자리한 음식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가다가 적기에 밖으로 나오지 못해 이제 그만 보내줘야 할 일도 생기기 마련이다.


보내줄 때를 알고 보내주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고 깔끔한가.

보내줄 시기 알고 보내줘야만 한다는 것도 너무 잘 알지만 보내줄 때마다 주부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더욱 쓰리고 아프다. 겉으로 표현하지만 않을 뿐. 한데 아픔을 꾹 누르고 애써 참는 주부의 배우자는 주부보다 더 마음이 아픈 척 반찬에게 커다란 이별 인사를 한다. 언성까지 높이며.


아니, 도대체 왜 이건 해 놓고 안 먹는 거야?

이거 봐, 이거 봐. 또 상했지. 으휴...


한숨을 푹푹 내쉬는 모습을 마주하며 행복한 나의 집은 순식간에 살얼음판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데 남편이 요리를 전담한 이후 아슬아슬하던 살얼음판이 싹 사라졌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를 목격했다. 남편이 냉장고에서 상한 음식을 꺼내 음식물쓰레기통에 갖다 붓는 모습을.

난 설거지 담당이므로 설거지가 끝난 후 배수구에 남은 찌꺼기를 처리하려 음쓰통을 보면 멀쩡한 처럼 보이는 음식들이 버려진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럼 반찬이 아까우면서도 은근한 회심의 미소가 돋아난다.


"어때? 입장 바꿔 보니 냉장고 안에 둔 반찬을 안 버리고 다 먹는 게 맘처럼 쉽지 않지?"


이 말이 나오려고 하지만 내가 살얼음판을 조장하는 꼴이 것 같아 꾹 참았는데.


오늘은 넌지시 물었다.


"자기가 음식을 하니까 좋은 점이 있는 것 같아."


하고 상한 음식이 담긴 음쓰통을 열어 여길 보라며 말은 안 하고 내 눈길만으로 음쓰통을 가리켰다.


"(실컷 힘들게 만들어놓고서 다 못 먹고 버리는 걸) 자긴 어떻게 생각해?"


'안 버리는 게 쉽지 않네.'라는 말을 너무 듣고 싶은데 아무 대답을 안 한다.


결국 내 입으로 또박또박 말해 준다.


"안 버리는 거 쉽지 않지?

 얼른 그렇다고 인정해!"


했는데 뜸을 들이더니


"모르겠는데."

란다.


고집이 황소심줄 저리 가라에 자존심도 무척 강한 사람이라서

"아니."라고 말하고도 남을 사람이 "모르겠는데."라고 하는 건 예스라고 내뱉지만 않았을 뿐 거의 내 말에 수긍한다는 뜻이다.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속이 시원하다.





가끔 TV에서

임신한 아내의 고충을 알고자 임신 만삭 체험복(배에 10킬로짜리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체험 의복)을 직접 입어보는 훌륭한 남편들을 본 적이 있다. "임신한 게 대수야? 원래 몸에서 체중만 좀 느는 거, 뭐 별 다를 게 있겠어?"라고 평소에 생각해 왔던 남편들은 배에 고작 10킬로를 얹었을 뿐인데 신발을 신기 힘들어했고 발톱 깎는 것도 버거워했다. 심지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누워있는 것도 배가 눌려 숨쉬기 힘들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본인이 직접 힘들고 나서야 열 달을 그 몸으로 살아야 하는 아내의 심정을 다소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만삭의 몸으로 가사도 해야 하고 어린 자녀를 돌봐야 하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남편들은 그동안 아내가 많이 힘들었겠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을 바꿔 상대의 처지가 되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찰과 다툼은 서로의 처지를 몰랐을 때 혹은 알려고도 하지 않을 때 빈번히 생기기 때문이다.

다툼 없이 사랑하며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마음을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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