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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Jul 25. 2023

음쓰통 안에 민달팽이

"여보~ 음쓰 좀 버려야겠는데?"

설거지하던 남편이 나를 호출한다.

"네~~~"

나 대신 설거지하는 남편이 고마워 이럴 때는 존댓말이 절로 나온다.


꽉 조이는 속옷 따위 집 안에서는 안 한지 오래인데 쓰레기 버리러 나간다고 갖춰 입긴 귀찮다. 가장 편한 방법인 앞치마를 툭 걸쳐 입고 손을 뒤로 하여 끈을 묶어 주었다. 앞치마 하나로 혹시 마주칠지 모를 타인에게 가벼운 예의를 차리고 한 손 무겁게 음쓰 통을 들고 문을 나선다.


꿉꿉한 여름이지만 해가 지니 아직은 선선한 느낌이 난다. 


아파트 끝자락 쪽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곳에 도착하여 카드를 대었고 뚜껑은 스르륵 열렸다. 여지없이 안에서 나올 초파리들을 각오하고 잽싸게 버리고 닫아야지 하는데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가 꿈틀댄다. 새끼손가락만 한 민달팽이다. 세상에... 더운 여름이라 통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코를 찌를 듯한 냄새에 나는 어서 그 자리를 뜨고만 싶은 생각뿐인데, 달팽이는 내가 오기 전부터 뚜껑이 덮여 있던 그 안에서 탈출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거다.


어떻게 들어갔을까.

느림보인 네가.


날개가 있어 펄럭 들어간 것도 아니고

빠른 발이 있어 호기심에 뛰어 들어간 것도 아닐 텐데.



맨 아래 바닥에서부터 나갈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꾸역꾸역 위로 꿈틀꿈틀 기어올라왔겠지.

널 어쩌면 좋으니.

상한 음식들이 뒤엉켜 나는 냄새와 안에서 나오는 날벌레들로 널 꺼내줄 생각조차 못한 나는 습관처럼 닫힘 버튼을 눌렀고 뚜껑은 예외 없이 닫히고 말았다.


네가 갑자기 빠른 걸음을 하지 않기를 바라며.

우직하게 닫히는 뚜껑이 너를 반토막 내지 않기를 바라며.

고작 나란 사람은 너에게 도움 하나 주지 못하고 희망고문을 해버린 또 하나의 시련이 되어버리고 말았네...


달팽이야.

시궁창 같은 곳에서 살아남은 게 용타.

눈에 보이는 곳까지 기어이 올라온 게 용타.

좀 더 힘을 내서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이제 곧

누군가에 의해 다음 음쓰 통이 열리는 날엔 넌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나와서 살만한 세상을 살 기회가 있을까.




https://youtu.be/Q6NieNXfLB8

이적의 달팽이를 찾다가 우연히 다른 달팽이를 만났다.


*image by pixabay (민달팽이가 안쓰러워 집 한 채 얹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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