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일은 귀찮고도 상쾌하다.
미니멀리스트를 표방하지는 않아도 아니 표방하고는 싶지만 늘 내 맘 같지 않아서 그리 할 수 없지마는 집안에 필요 없는 물건을 간추려 밖으로 배출하고 나면 어수선했던 집이 한결 더 쾌적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뭐 늘 그렇듯 많은 양을 내버리지는 못하지만 버렸다는 그 행위 자체가 해묵은 과제를 해치운 듯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든다.
고작 10리터의 쓰레기봉투를 들고 발걸음도 가볍게 걸어본다. 여차하면 어릴 적 기분 좋은 날이면 걸었던 리드미컬한 걸음까지 걸을 판이다. 친구와 손에 손 잡고 발을 맞추어 오른발 두 번, 왼발 두 번 껑충껑충 뛰듯 걸으면 좋았던 기분이 더 좋아지게 만드는 마법 같은 걸음. 후텁지근한 습기를 머금은 더운 열기는 밤 9시가 넘어가니 선선한 바람과 함께 한껏 더 상쾌함을 선사해 준다. 소소한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얼마 안 가 시야에 대형 쓰레기통이 들어온다.
이제 곧 도착하기 몇 보 직전인데 이미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아주머니가 보인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쓰레기를 버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느낌이다. 요지부동 자세는 흡사 쓰레기통을 앞에 두고 서서 무슨 작업이라도 하는 것 같다. 쓰레기를 버리는 시간이 그토록 오래 걸릴 일인가?
쓰레기 버릴 때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겠냐마는 굳이 나열하자면
1. 대형 쓰레기수거함 뚜껑을 연다.
2. 쓰레기봉투를 던지듯 안으로 집어넣는다.
3. 쓰레기통 뚜껑을 닫는다.
이렇게 초간단으로 끝날 일을 냄새나는 쓰레기통에서 저리 오래 걸릴 일이 무어람? 도대체 뭘 하는 거지 싶었는데 뭔가 꼼지락꼼지락 분주한 손놀림이 얼핏 보였다.
아... 남이 버린 쓰레기봉투의 매듭을 푸는 중이구나...
누가 쓰레기를 버리러 오든가 말든가 관심 없는 그분의 발 옆에는 쓰레기로 보이는 봉투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다. 쓰레기전용봉투가 아닌 일반봉투다.
겨울에는 날이 추워 초파리도 없고 곰팡이도 번식하기 어려운 계절이니 꾸역꾸역 쓰레기를 모으고 또 모아 버리는 편이지만 여름에는 어림도 없다. 쓰레기봉투 값 아끼느라고 초파리와 대전쟁을 벌여야 하거나, 썩은 내 진동하는 냄새와 동거하는 게 끔찍해서라도 쓰레기봉투는 다 채우지 않고 버려대기 바쁘다. 저분은 그걸 노린 것이다. 버려진 쓰레기봉투의 여유 있는 공간을. 매듭을 풀고 자신의 쓰레기를 약간 집어넣어 매듭을 다시 묶고, 또 다른 쓰레기봉투의 매듭을 풀고 또 자신의 쓰레기 일부를 넣어 매듭을 묶고 하길 반복하는 중이다.
알뜰하다고 봐야 할까.
궁상맞다고 봐야 할까.
평소와 똑같이 그저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 나는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눈치 볼 필요가 없건만, 그분은 태연한데 오히려 나는 뭘 잘못한 사람처럼 쭈뼛쭈뼛, 보고도 못 본 척, 관심 없는 척하느라 괜히 눈동자의 초점을 딴 곳에 두기 바쁘다. 행여 부끄러움을 불사하고 얼굴이 뜨거워져도 겨우 참는 중인데 괜히 내가 알은체를 해서 더 얼굴이 붉어지게 만들 필요는 없다. 내 눈은 그녀를 투명인간 보듯 하며 가지고 나간 쓰레기봉투만 살포시 놓아두고 유턴하듯 자연스럽게 쓰윽 돌아 걷는다.
쓰레기장에서 점차 멀어지지만 여전히 나의 뒤에서는 부스럭부스럭 매듭 푸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버릴 공간이 아직 있는데도 가지고 나간, 내가 버린 쓰레기봉투의 매듭을 푸는 소리인가 보다.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에게 자신이 느낄 창피함보다 새로운 쓰레기봉투가 왔다는 반가움이 더 커 봉투의 여유공간을 찰나의 시간에 매의 눈으로 계산하던 눈동자가 떠오른다.
얼기설기 담겨 부피만 커진 쓰레기봉투를 마치 테트리스하듯 압축하여 정리 정돈해 주니 좋은 일이라 보는 게 맞을까.
남들 다 돈 주고 사는 쓰레기봉투를 안 사고 혼자 무임승차하여 이득을 보는 것이니 얌체 같다고 보는 게 맞을까.
이래저래 형편이 쪼들려 조그마한 것이라도 아껴 가정경제에 도움이 좀 돼 보자 하는 행동일 수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는 게 맞을까.
모르겠다.
그저
기분이 참
묘... 하기도 착잡하기도 하다.
*photo by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