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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Jul 30. 2024

회사에 있는 남편이 나에게 벗으라고 했다

네???


어머님의 밭농사는 올해도 풍년이다. 밭농사에 안 나오는 야채가 없고 늘 풍작이라 덕분에 우리 집 냉장고는 미어터진다. 아무리 먹을 게 넘쳐도 뱃속에 버리지 말자고 말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먹을 것을 다 먹지 못해 썩혀 버리는 것이 아까워 자꾸만 자기 뱃속에 넣는다. 그러니 남편의 배는 자꾸 자꾸 남산과 경쟁 중이다.


음식이 좀 아깝긴 해도 건강을 생각해서 조금씩 먹으라고 요새 남편에게 잔소리를 좀 해댔는데.




카톡!



남편에게 백만 년 만에 톡이 왔다.


내가 메시지를 두 줄을 보내든, 세 줄을 보내든, 장문의 러부레타를 보내든 대답은 한결같이 "ㅇㅇ"이던 남편이다. 조금 기분 좋으면 "응", 매우 기분이 좋으면 "알았어."를 보내는 최강 단답형 남편이 무려 내가 톡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내게 톡을 보내온 것이다.


뭘까. 무슨 내용일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근데 폰을 잠금해제를 하기도 전에 이미 밖으로 보이는 내용이  


세상에!


벗어


였다...


응?????


남편이 나에게 벗으라고 했다.

지금 만일 한 공간에 같이 있었다면 어울리지 않는 야릇한 미소라도 한 번 지어 보이며 괜한 말뿐인 "변태니?" 하고 말하고, 고양이도 아니면서 냥냥펀치도 날린 다음 콧소리 가득 야유라도 보냈겠지만...


지금 남편은 회사에 있다.


회사에 있는 남편이 집에 있는 아내에게 "벗어"라고 톡을 보내다니.


내가 벗으면 뭐 할 건데?

원거리에서 가능한 게 뭐가 있는데?

뭐가 있긴 있는데 나만 모르는 거니?

하며 괜히 혼자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의아함의 소용돌이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33도를 육박하는 살인적인 무더위라 이 인간, 잠시 정신이 오락가락한 겐가...


아니지.

나부터 정신을 차려보자.

톡을 찬찬히 보자.


어?! 위에 다른 내용이 또 있네?



나도 먹는 거 조금씩 먹고 싶어

이젠 먹는거에 버서나고 싶어


벗어


그러니까


벗어나고 싶다는 말에서 오타를 스스로 깨닫고 뒤늦게 정정한다는 게 맞게 쓴 글자는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두고 틀린 글자 딱 그것만 정정하다 보니


"벗어"


가 된 것이었다.






평소 틀린 글자를 못 견뎌하는 마누라를 위해 나름 배려를 해 준 것이다.


글 쓰는 아내를 둔 탓에 열 일 하는 남편의 손가락이 고생이 많다.


덕분에 시원하게 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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