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화수분 같은 텃밭에 야채들이 무궁무진하게 나오니 날이면 날마다 식재료를 전달받아 먹어치우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중인데 어머님께 카톡이 왔다.
주로 음식 보내 준 것과 관련한 질문을 하신다. 내가 준 음식 다 먹었냐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요리해 먹으면 맛있다, 혹시 맛없으면 도로 가져오너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여태 다 안 먹고 너희는 도대체 뭘 먹고 사느냐 등등 주로 난감한 질문들이 줄을 잇는다.
주신 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저희가 다 알아서 먹어 치울게요 걱정은 제발 붙들어 매셔요 하고 되바라진 말을 한 번만 해보면 어떨까 싶지마는 이럴 땐 마음을 다잡고 역지사지의 시간을 갖기로 한다.
내가 만일 시어머니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기껏 음식을 해주고 신선한 야채를 주었는데 제때 먹지 않고 아직도 남았다고 하면 도대체 저것들은 내 음식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내가 준 건 안 먹고 맨날 몸에 안 좋은 것만 먹고사는 건가 의아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른이 애써 키운 야채로 만들어 주신 음식인데 처치곤란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면 매우 불효하는 마음이 들어 편치 않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뛰어드는 심청이는 못 되더라도 어른들 눈에 못 볼 꼴을 보여서는 안 되지 하는 마음을 먹는다.
거짓말은 매우 나쁜 것이므로 어지간하면 참말만 말하려고 하지만 때때로 하이얀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매번 아직 남았어요, 먹고 있어요, 아이들이 별로 안 먹어요 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가 없다. 내색은 안 하셔도 속이 얼마나 상하실지 그 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호박에 대한 존재를 물어오시는 어머님께 가뿐하고 사뿐히 "먹었어요" 답톡을 보냈는데.
"우리 시후 빼고 먹은 거야? 시후가 호박 먹어보지 않았다고 말하길래~
왔을 때 시후야 호박맛이 어땠어 물으니 그러드라고~"
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아, 완전범죄가 될 뻔했는데 지난주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어머님댁에 방문했던 게 뒤늦게 떠올랐다. 그때 시후더러 단호박의 맛을 묻고 아직 안 먹은 걸 알고 계신 상태에서 재차 나에게 카톡을 주실 줄은...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으니 나는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나방이 되어버렸다. 완벽히 거미줄의 정중앙에 딱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걸렸다고 이실직고를 할 수는 없다. 한 번 신뢰가 깨지면 앞으로 영영 며느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으실 게 분명하니까. 사람 사이의 신뢰가 요새는 탄탄하지 않으니 진실을 말해도 거짓인데 진실인 척하는 거 아닌가 의심하곤 하는데 더구나 고부 사이에서 한 번 틀어지면 이건 답이 없다. 그나마 봐줄 만한 고부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어쩐다.
먹어놓고 기억도 못하는 바보천치 아들로 만드는 수밖에. ㅠ.ㅠ
"네에? 먹은 지 오래돼서 까먹었나 본데요?"
라고 톡을 보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바로 답톡이 또 왔다.
"편애 하냥? 먹어보지 않아서 맛을 모른다는 거야~ㅎㅎㅎ"
으악... 망했다. 똘똘한 놈이 할머니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평소 곧잘 하는 어른스러운 말투로 또박또박 말했을 장면이 떠오른다. 그래도 여기서 후퇴하면 시작을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냥 밀어붙이기로 한다.
"아이고, 편애는요~ 연아한테 미안하지만 시후가 쪼그마하니까 시후를 더 예뻐하죠 ㅎ"
땀이라고는 모르는 나의 몸에서 등줄기를 따라 삐질 한 방울의 땀이 흐른다. 우선은 이렇게 일단락되긴 했는데 아마도 어머님은 긴가민가 하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