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포르투갈의 땅끝마을
저먼 바다 끝엔 뭐가 있을까?
대서양을 볼 때마다 아틀란티스 소녀가 떠오른다.
대서양이면 아틀란틱.. 아틀란틱 하면 아틀란티스 소녀.. 보아..
연상 작용은 늘 이렇게 쓸데없이 성실하다.
그래서 머릿속에서는 계속 그 노래가 흘렀다.
보아의 '아틀란티스 소녀',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렇다.
22년 전 아틀란티스 소녀, 보아가 물었다.
"저 먼바다 끝엔 뭐가 있을까?"
그보다 수백 년 전, 호카곶에서 포르투갈인들도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저 먼바다 끝엔 뭐가 있을까?"
호카곶은 지리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이다.
말 그대로 땅의 마지막. (동쪽 끝은 러시아에 있는데 언젠가 꼭 가려한다.)
절벽 위에 서면 끝없는 바다뿐이다.
서쪽 끝이니, 일출보다는 일몰이 더 어울린다.
해 넘어가는 것을 보기 위해 급하게 갔다. 다행히 해는 지지 않고 있었다.
다만 구름이 방해했다. 덕분에 해넘이는 못 봤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진부한 말을 뒤로하고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이곳을 더욱 눈에 담기로 했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유라시아 대륙의 끝인 호카곶에 새겨진 한 문장.
짧은 문장에서 포르투갈인의 두려움과 설렘이 같이 느껴졌다.
사실 유럽의 해남 땅끝마을일 뿐이다. 실제로 여기서 항해를 시작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마음속에서 뭔가 꿈틀거린다.
나는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포르투갈인은 이곳을 대륙의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봤다.
안전한 땅을 떠나 과감하게 바다로 나아갔다.
물론 희생도 컸다. 그래서 더 극적인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아찔한 절벽 위에서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고 있자니,
과거 바다로 나아가고 가했던 포르투갈인의 설렘과 두려움이 조금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온 김에 하자"라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평소에는 안 했을 일도 온 김에 한다.
괜히 했다고 후회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잘했다고 생각한다.
돈을 쓰는 순간은 아깝지만, 그 기억은 금방 사라진다.
대신 그 돈으로 얻은 경험은 제법 오래간다.
(돈을 지출한 기억 때문에 더 기억이 오래가는 것일지도..)
호카곶에서 '온 김에 한 것'은 인증서 만들기다.
뱃속에 있는 뿡뿡이와 함께한 첫 여행이니까.
우리 셋의 이름을 적은 인증서를 만들었다.
세명의 한국어 이름은 제법 길었는데도 군말 없이 멋지게 적어주셨다.
11유로만 지출하면 되니 한 번쯤 해서 집에 걸어두시길!
사실 이곳 풍경만 보면 압도적이진 않다.
사진만 보면 제주도인지 울릉도인지 구분이 헷갈릴 수도 있다.
그래도 이곳이 다르게 느껴지는 건 지리적 의미 때문이다.
다만, 조용한 분위기가 한몫한다.
주변에 작은 건물 몇 채만 있을 뿐, 관광객들 외에 동네는 조용하고 한산하다.
관광객들의 소음은 바람소리에 묻히고, 그들의 모습도 넓은 자연에 묻힌다.
그래서 이곳에 서있으면,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세상의 끝에 온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디스토피아 감성이다.
(우리나라라면 화려한 리조트와 횟집에 잠식당했을 텐데.)
"끝이라는 것은 곧, 새로운 시작"
학창 시절이 끝나자, 취업 전쟁이 시작되었고
취업 전쟁이 끝나자, 무한 경쟁사회가 시작되었다.
솔로가 끝나자 알콩달콩 신혼생활이 시작되었고,
신혼생활이 끝나자 소중한 아들이 태어났다.
무엇이든 끝을 너무 축복하지도,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끝은 그냥 다음 장의 첫 줄일 뿐이다.
사실, 진짜 끝이란 것은 없는지도 모른다.
벌써 한 해가 저물어 간다.
7월까지 포르투갈 여행 일지를 마무리하기로 했던 나의 목표는 5개월이 지연됐다.
그렇지만 포르투갈 여행했던 그 날씨가 지금과 비슷해서 감정 이입은 잘됐다.
(고 스스로 합리화해 본다.)
올해 안에는 벼락치기로 포르투갈 시리즈를 마무리해보고자 한다.
끝을 향해서, 그러니까 또 다른 시작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