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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Aug 06. 2023

3.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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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에 있을 때 난 사촌언니 집에 가끔씩 놀러가곤 했는데 언니 또한 장기연애 후 결혼 한 케이스라

오래 만난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같은 걸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난 언니에게 많이 고민 상담도 했다. 

사실 그때는 발렌틴이 한국에 오기 전이었고 반복적으로 말하던 '촉'을 느낄 만한 무엇도 없었기 때문에

말이 고민 상담이지 솔직히 말하면 그때 난 발렌틴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자랑하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말로만 걱정되고 부담스럽다, 왜 그렇게 떨어져 있는 거에 대해서 너무 힘들어하는 지 모르겠다 면서

그가 날 '더' 사랑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지만 느끼지 않은 척 위선을 떨어댔는데. 언니는 발렌틴이 나한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낯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한참 떠들던 나에게 끝에 해준 말이 있었다. 


"너, 그거 다 돌아와. 못된 짓 하면 꼭 자기한테 돌아오더라." 

라고. 


그때는 언니가 내가 은근슬쩍 자랑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 겁을 주는 걸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언니의 예언은 적중했다, 슬프게도. 


이별을 말하는 여러 노래들 중엔 연인의 마음이 떠난걸 두고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워 함을 말하는

노래들도 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정 사랑의 불꽃이 형형했던 그의 눈동자가 이젠 모든 빛을 잃은 채 

날 향한다는 사실을 감당 하지 못하겠다는, 그런 류의 가사를 볼 때마다 그게 뭐야. 했고, 

그의 관심을 얻기 위해 별 짓을 다 하는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보면서 왜 저럴까 싶었는데 나에게 그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드라마보다 더 잔인한 현실이었고. 


발렌틴의 친구들과 살면서 제일 불편했던 건 바로 청소였다. 물론 작년 크리스마스 때도 그다지 깨끗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예사롭지 않게 넘겼는데

동거를 시작하면서도 느낀 사실이지만 내가 살기 시작한 이상 이제 예사롭지 않은 일이 된다. 

우리의 방과 욕실은 따로 떨어져 있었지만, 공용공간인 부엌은 10에 9의 경우로 더러웠다. 설거지할 그릇들은 항상 쌓인 채 주방은 방치되어 있었고 딱히 청소 당번도 없었다. 그들은 발렌틴 말로는 '친한 친구' 였고

누구 누구 할 필요 없이 치울 수 있는 시간이 있는 사람이 치우면 된다는 게 그의 황당한 답변이었다. 

요리를 좋아하는 나는 스트레스를 정말 만빵으로 받았다. 치워주는 것도 한두번이지 왜 내가 너희들이 

싸질러놓은 똥을 치워야 하는거지? 내 남자친구도 아니고 너흰 단지 남자친구의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나에겐 어쨌든 완전한 타인인데 내가 왜 이걸 견뎌가면서 내가 못참아서 치워야 하는거지? 란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청소는 역시나 또 나와 발렌틴의 발목을 붙잡았고, 발렌틴은 끝까지 나서서 이 문제를 바로 잡지 않았다.


난 발렌틴이 최소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해주길 빌었다. 넌 그들의 친구이자 나의 남자친구니까. 내가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데 같이 사는 공간에서 이제는 더이상 너희들만 사는 공간이 아니니까 청소 당번을

정해서 좀 치워주면 안되겠냐고 애들한테 말 좀 꺼내달라는 내 간절한 부탁을 그는 듣지도 않았다. 

돌아오는 답은 항상 똑같았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살아왔어. 너가 주방 안 치우고 싶으면 치우지 않으면 돼." 라며 반쪽짜리 해결책을

제시할 뿐, 절대로 나의 편에서 배려해주고 생각해주지 않았다. 아예 그는 나의 의견을 묵살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난 매번 울고 스트레스 받았다. 

청소가 안되어 있다는 거에 대해서 짜증이 났다면 더 이상 발렌틴이 날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정말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는 나보다 친구들이 더 소중했다. 

'나는 그의 여자친구기 때문에 넌 내 사람이고 그래서 날 이해해줘야 한다'라는 전제는 이미 그에게 너무 

당연한 것이었고 친구들에게 불편한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했다. 

친구들은 그에게 두통을 주지 앟는, 언제든 기분을 환기 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그에 비해 나는 그에게

골칫거리, 딱 그 정도였다. 


나의 관계 변화를 지켜보고 있던 매니저 언니 오빠는 너무나 안타까워 하며 나에게 밥도 사주고, 여러가지 

조언도 해주셨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설거지를 해보라던가, 아무 말 하지 말고 집에 늦게 들어가 보라는

류의 조언으로 관계개선을 위해 도와주셨지만 발렌틴에겐 아무것도 먹히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언니 오빠는 내 얼굴이 말이 아니라며, 너가 왜 이렇게 힘들고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옆에서 많이 거들어주셨다. 그 분들덕에 그나마 그 시기를 버텼다. 


발렌틴이랑 조금이라도 관계를 낫게 하고자 내가 더 노력을 하기도 했는데, 일이 끝나고 파이브가이즈로

찾아가 같이 퇴근하려고 깜짝으로 찾아가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기뻐하던 그였는데. 

이제 나에게 돌아오는건 무미건조하게 왜 왔냐고, 그냥 먼저 가지 그랬냐며 냉정하게 대응하던 그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그는 줄곧 핸드폰만 만졌다. 

내가 옆에 있는데, 그의 눈치만 보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내가 있는데. 절대 날 쳐다보지 않았다. 

내 존재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그 때를 생각하면 내가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될 만큼 난 비참했고 처절했다. 

용기 내 그에게 "너, 이제 나랑 말하기 싫어? 왜 그러는거야 도대체?" 라고 말을 걸었지만

제발 그만 좀 하라는 그의 날이 선 대답과 표정. 역에 도착해서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서도 우린 절대 나란히

걷지 않았다. 한 때는 절대 나의 뒤에 서있지 않던 그였는데, 무조건 자신의 옆에 나를 딱 붙여놔야 

안심하던 그였는데 이제 그는 핸드폰에 눈을 고정시킨 채 나보다 훨씬 앞서 걷고 있었다. 


그때의 11월은 나에게 무섭도록 잔인했고 시렸다. 매일밤을 거의 눈물로 지새웠던 듯 하다. 이런 일이

그 누구도 아니고 발렌틴을 통해서 나에게 일어나다니, 더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믿었던 그가 

내가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마음을 추스릴 겨를 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난 방을 찾기 시작했다. 저 청소 건을 해결해주지 않으면 난 나가겠다고 발렌틴에게 누차 말했고

그는 나를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내가 쉽게 독립적인 선택을 하지 못할 거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너무 한심한 건 방을 찾으러 방을 보러 갈 때도 발렌틴에게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단 거다. 

내가 그렇게 멍청했다. 조금이나마 변명을 해보자면 나 방 찾는거 이만큼 진심이라고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라고 말하고 싶다. 나 이렇게까지 힘드니까 좀 이제는 너가 양보하라고, 나 충분히 힘들었다고. 너 정말로

날 이렇게까지 추운 겨울날에 이사하게 만들어야겠냐고. 그렇게 돌려 돌려 말한 거였지만 그에게 난

말 그대로 안중에도 없었다. 


난 12월에 나가기로 결심을 했다. 물론 굉장한 악조건이긴 했던게 코로나 기간이어서 아무 share house나 

들어갈 수도 없었던 데다가 겨울 시즌엔 영국에 나오는 집이 정말 없다. 하지만 난 이젠 여기서 더 있다간

내 멘탈이 남아나지 않을 것 만 같았다. 이미 갈기갈기 찢겼지만 지금에서라도 날 보호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터진 12월의 락다운. 난 집에만 있어야 했고 이 시간을 이용해 집도 찾고 논문에도 집중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그 날. 그 날도 어김없이 발렌틴은 밑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플랏 메이트들 말고도 또 2명의 친구들이 더 와있었으며 난 당연히 위에 쳐박혀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중, 

발렌틴은 예전의 발렌틴처럼 내 점심을 챙겨줬다. 꽤나 오랜만에 받는 호의에 난 잠시 기분이 좋아졌고

락다운 기간동안 관계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내심 기대도 했다. 그도 그럴게 그 날의 발렌틴은 좀

유해져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같은 상황은 예고도 없이 나에게 쳐들어왔다. 

갑자기 다시 올라온 발렌틴은 잠시 내 옆에 머물었고 난 기회다 싶어 솔직하게 내가 느끼는 바를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날 꼭 안아주더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나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난 너를 정말 아껴. 넌 어쩄건 나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가장 많은 처음의 순간들도 공유했고. 

널 내가 아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널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아. 



와우-. 내가 들었던 이별을 고하는 방법 중에 최고로 위선적인 개소리였다

아낀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겐 누구나 양가감정이 공존하고 절대적인 그

무언가는 없으니까. 근데 이건 아니었다, 걔는 최고로 비겁했다. 아낀다는 말 그딴거 다 뺐어야지,

너는 그냥 나쁜 사람으로 남고 싶지는 않지만 동시에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알려주고 싶고. 그치?

내가 너무 귀찮고 성가신 존재라는 걸 이쁘게 포장하고 싶었던거잖아. 아주 멜로 드라마 주인공 납셨네. 

지금은 물론 객관적으로 그게 얼마나 개소리였는지 판단할 수 있지만 그땐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아니, 사랑하지 않는다잖아. 그래도 조금의 사랑이라도 남아있다고 믿고 싶었던 나에게

완벽하게 확인으로 사살해버렸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아니 이 집 안에 믿을 건 너밖에 없었는데 이제 나한테 사랑이 한 톨도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면 난 이 집에서 완벽한 이방인이었고 남아있을 이유 또한 전무했다.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끄윽끄윽 대며 매니저 언니께 전화를 했고 언니는 


"거기 더 이상 있지 말자. 지금 짐 다 싸서 나와. 언니 집에 잠깐 있어. 언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지금 짐 다 싸,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짐 다 싸서 우버 타고 와."

라고 했다. 난 전화를 끊은 직후 바로 짐을 쌌다. 


상황으로만 보면 내가 제 발로 나간걸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도 그렇다.

하지만 아니, 이건 쫓겨난거다. 그는 명백히 날 쫓아냈고 난 구차하게 매달릴 수 없었다. 

사랑하지 않음을 고백한 건 우리 관계의 종결을 선언한거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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