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그렇게 중요하더냐.
그는 물론, 당연히 나의 사랑을 갈구했다. 처음에는.
나도 초기의 그 이상하게 불안한 감정들은 자연스레 잊혀졌고 어쨌건 영국에 돌아왔더니 내가 쉴 수 있고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있음에 안도했고 감사했다. 난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끝나고 영국을 떠나서도 한식당의
매니저 언니오빠와 계속 인연을 이어갔고 발렌틴이 한국에 왔을 때 마침 언니 오빠도 한국에 와계셨어서
같이 밥도 먹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아르바이트를 그 곳에서 계속 하기로 했다.
나도 생활비는 벌어야 했다, 양심이 있지.
야속하게도 코로나의 여파는 날이 가면 갈 수록 심해지면 심해졌지 옅어지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석사 수업은
온라인으로 진행하게 됐는데, 이 지점에서 난 두고두고 코로나 시기에 석사를 한걸 후회한다.
말 그대로 비자를 위한 석사 학위의 목적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은게 좋지 않은가.
코로나만 없었다면 대면 수업에, 다양한 사람도 만나보고 직접 영국의 대학원도 경험해보며 새롭고 색다른
시간들을 많이 보낼 수 있었을텐데 난 얼떨결에 대학교에 돈만 대준 바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땐 그런거 생각할 겨를은 없었고 단지 첫 석사이고 논문이라는 거대한 과제가 내 앞에 있었기에
굉장히 쫄아 있었다. 워홀 할 때도 같이 일했던 언니 한명이 얼마나 논문으로 고생을 했는지 알기 때문에
난 미리미리 준비해놓고 싶었고 그 준비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한동안 괴로웠다.
거기다가 처음 경험해보는 온라인 수업, 내가 읽어야 할 수많은 논문들, 이해되지 않는 학문적인 용어들은
내 머리를 아침부터 밤까지 지끈거리기에 충분한 양이었고 난 학기 첫 주부터 거의 울며 겨자먹는 수준으로
고통스러워 했다.
그럴 때 있잖아요 우리, 이해가 안되는데 이해 안되는 것도 짜증나고 이해 못하는 나도 등신같고 그냥 모든게
다 안 되는 것만 같아서 갑자기 무기력해지는 기분. 영어로 이렇게까지 좌절해 본 적 없는데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은 것처럼 느껴져서 첫 주는 좌절의 굴레 안에서 한동안 허우적 거렸다.
그런 나를 발렌틴은 전폭적으로 서포트 해줬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밤까지 방에 틀어박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고 있는 나에게 발렌틴은 항상 끼니를 챙겨줬는데,
발렌틴의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내 식사를 항상 걱정해줬다는 것이다. 싸웠건 싸우지 않았건 그는 내가
밥을 잘 먹었는지를 걱정해줬다. 마치 딸을 키우는 것 마냥. 내가 요구하지 않아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샌드위치 등등. 그렇게 날 챙겨줬고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나는 고맙단 작은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난 이미 내 눈앞에 산적해 있는 과제들과 논문들도 버거워서 그가 나에게 베풀고 있는
친절은 눈에 뵈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말했듯이 발렌틴은 이제 예전의 그가 더이상 아니었다. 주기만 해도 행복한 그는 이제 없었다.
give가 있었으면 take도 따라야 하는 어찌보면 당연한 진리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선 없어도 괜찮았었는데
이젠 발렌틴의 인내심이 그걸 허용해주지 않았고 그는 꽤나 이르게 폭발했다.
넌 내가 이렇게 너한테 맞춰주고 있는게 안 보이냐부터 해서 영국 도착한 이후로 너가 날 한번이라도 제대로
봐준 적 있냐 같이.
사실 예전 같았으면 그의 이런 불만은 나에게 귀여운 투정으로 들렸을 거다. 어쨌든 날 사랑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린 어리광이라고 느껴졌을테고 난 잠시나마 미안하다며 사랑해줬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의 발렌틴은 그게 아니었다. 사랑해서라는 느낌보다 그가 날 시험해보는 것 만 같았다.
한국에서부터 나와의 관계에 의문을 가져왔던 그가, 슬슬 우리 관계에 권태로움을 느끼던 그가,
아직도 날 향한 자신의 감정이 똑같을런지 그걸 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한마디로 싸움을 걸어오고 있었다.
논문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난 왜이렇게 유치한 이유로 시비를 걸지란 생각은 했지만 조금은 미묘하게
그의 투쟁이 전과는 다르지 않단 걸 인지는 하고 있었고 나도 불안해져갔다.
난 9월 말에 도착했는데 우리의 사이는 10월 초부터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을 두려고 하는 시도조차 없었다. 그에겐 친구들이 있었고,
나라는 존재는 그의 안에서 점점 희미해져가는게 육안으로 보였다.
우리가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아예 안한건 아니다.
내가 영국에서 처음 한국으로 떠나기 전 크리스마스를 보낸 친구의 집에 놀러가서 하룻밤도 지새고 왔는데
아마 우리 둘의 시간을 가졌던게 중요했던 것 같다. 그 망할 놈의(?) 친구들과 떨어져 있던 발렌틴은 당연히
나한테 더 집중해줬고 난 '그래, 원래 이런 앤데.. 잠깐 이러는 걸거야.' 라고 생각할 만큼 애정 전선은
다시 회복 될거라고 믿었는데,
애정 전선의 회복은 개뿔.
난 10월 초부터 12월까지 감히 단언컨대, 내 인생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다시 런던에서 락다운이 선포되던 날, 그날을 난 절대로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