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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Aug 07. 2023

4.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이별.

마음 정리 수순.  

그가 날 그렇게 내쫓는 걸로 마무리 지어지는, 이 지독히도 어이없는 결말은 아마 예정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실 그가 그럴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건 그의 언행에서 조금씩 드러났다. 

내가 그 집에서 나오기 전 그랑 자주 다투곤 할 때, 가히 충격을 먹게 된 그의 말이 있었는데

'2주 안에 나가. 너도 집 알아보고 싶다고 했잖아. 너가 싫다고 해도 내가 너 짐 다 싸서 밖에 내놓을거야.'

라고. 

내가 쓴 것보다 그때의 그의 말투는 훨씬 냉혹했고 잔인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한없이 약해져 있었고

이미 예전의 발렌틴에게 당당한 나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 됐었기 때문에 자신감있게 맞대응 하지 못했다. 

이미 짓물러 터질대로 터진 내 마음을 다 잡은 척조차 할 수 없던 나는 상처 받은 마음을 안고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니가 내 사정 봐줘야 한다고, 알지 않냐고 집 찾는거 어렵지 않냐고. 그렇게 비참하게, 

어찌보면 너무나 바보같이 맞섰다. 그의 앞에 간신히 서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게 그때의 나에겐 

최선이었다는 사실. 

또 난 그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우리 엄마였다. 

발렌틴은 우리 엄마와 헤어진 이후 우리 엄마만 얘기하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런 애였다. 난 그 점을

십분 활용했다, 이런 불효녀를 봤나.


난 정말 엄마한테 할 짓이 아니었는데 그때의 나는 아직 어리고 미숙해서 엄마의 마음까지 돌볼 생각을

못했다. 한 침대에 누워 등을 돌려 자던 그날 밤, 나에게 나가라고 소리치던 날 밤에 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난 걔가 내가 대충 뭔 말 하는 지 알고 있을 걸 난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눈물을 꾹 참으며, 어이 없다는 식으로 엄마에게 줄줄이 걔의 만행을 고발했고 엄마는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렇지만 단단한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걔가 아무리 널 잘 이해해준다고 해도 어쨌든 외국인은 외국인인거야. 거기 그만 있고

얼른 새로운 곳 찾아."

엄마는 내가 발렌틴과 같은 방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같은 집에서 산다는 것, 그리고 그의 

친구들과 산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내가 청소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 하고 계셨다. 

그런 그를 엄마는 당연히 괘씸해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어쨌든 다시 영국으로 딸을 보내도 나름 믿을 

구석이 생겼다는 것에 엄만 내심 안심했던 것이다. 엄마는 내 남자친구여서도 있었지만 내 딸을 타지에서

그래도 챙겨주고 지켜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좀 더 내 딸에게 잘해주라고 그에게 더 잘했다고 후에 말했다.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면 다른 누군가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베풀거라고. 

진심의 선순환을 믿는 사람이라 아마 우리 엄마는 말은 안했어도 굉장히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다. 


아마 지금이라면 그냥 혼자 조용히 이 일을 처리했을 테지만, 그땐 그러지 못했다. 

발렌틴의 관심을 얻기 위해 엄마의 걱정을 희생 삼아 난 엄마의 마음에 큰 민폐를 끼쳤다. 

전화를 끊자마자 발렌틴은 몇 분 후 조용히 뭐라고 했냐고 물어왔고, 난 단순히 상황 설명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목소리가 커진것 뿐이었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그러자 이러쿵 저러쿵 내가 진짜로 널 

나가라고 그랬겠냐며, 너 나를 알지 않냐고 내가 그런 사람이냐고 말하는데

난 이제 발렌틴을 몰랐다. 적어도 그때의 그 발렌틴은 그때의 내가 아는 그가 아니었음이 확실했다. 


난 짐을 싸기 시작했고 발렌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하는 듯 했다. 

처음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내가 널 나가라고 했냐고 잡는 것 처럼 행동했지만

그도 이게 맞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고 묵묵히 의자에 앉아 짐을 싸는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난 그때도 바보같이 내가 발렌틴에게 한 미안한 행동만 생각이 나서 그놈이 나에게 한 파렴치한(?) 짓은 

생각도 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마스크도 좀 나눠주려고 까지 했다. 미쳤었지, 미쳤어. 

발렌틴은 내가 내려가기 몇분 전 1층에 있던 친구들에게 상황을 대충 설명했고 나름의 배려로 그들을 

방에 들어가있게 했다. 난 내려가면서도, 우버를 기다리면서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우리가 끝이라니. 이렇게 허무하게, 이렇게 갑작스레 장거리 연애의 끝이 와버리다니. 

믿을 수 없었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우버에 몸을 싣고 떠나는 나를 그는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보더니 

내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이미 몸을 돌리고 집으로 들어가버렸고 그걸 본 난 이로써 

관계의 종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가 밤 12시 즈음이었나, 나보다 큰 짐가방 2개를 들고 온 나를 본 매니저 언니 오빠는 쓴 웃음을 지으며

날 맞이해주었고 난 언니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언니 오빠는 새벽 내내 내 눈물을 받아주셨고 끝까지 내 얘기를 들어주셨다. 또 한인 사이트에 들어가서 지금

당장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임시 숙소까지 이미 알아놔주셨는데 내가 매번 말하지만 나 인복 하나는 죽인다. 

언니와 오빠는 정말로 우버를 타고 온 나를 보고 놀라셨다고, 아무리 그래도 지금 새벽인데 너 혼자 보낼줄은

몰랐다고. 그 말들이 내 가슴을 더 후벼팠다. 오빠는 나 대신 그를 무진장 욕해주셨다. 

'걔 진짜 나쁜거야. 내가 남자로서 걔 진짜 나쁘다고 하는거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자기 여자친구 였던 

애를 이렇게 아무 조치 없이 밤에 보내니. 아무리 헤어졌어도 최소한에 자기 연인이었던 사람한테 갖출 

예의라는 건 있는거지.' 

오빠는 진심으로 그의 처사에 황당해 했고 화내주셨다. 

새벽 내내 날 달래주시며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더 상세히 들으신 언니도 조심스레 언니가 느꼈던 걸 

말해주셨는데, 사실 발렌틴이 널 바라보는 눈빛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고. 

한국에서 널 바라보는 발렌틴의 눈빛이 너가 영국 놀러왔을때 작년 12월의 눈빛과 달라졌음을 느꼈었다고.

12월 발렌틴의 널 향한 태도, 말투의 변화가 언니도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언니가 널 너무 아껴서 아마

괜히 더 그렇게 예민하게 생각했던 걸 거라고 생각하셨었다고. 

그걸 듣는데 이미 그는 티가 나고 있었구나, 내 촉이 틀리지 않았었구나, 관계추가 기울어진건 확실했구나

생각했다. 


그 추운 겨울 언니 오빠는 혼자 마음을 비워내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내가 혼자 머무를 수 있는 

숙소를 재빠르게 예약해주셨고 돈도 미리 내주셨다. 이 돈은 천천히 갚아도 되니까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혼자 천천히 맘 잘 추스르라고. 

약 3일정도 언니, 오빠 댁에서 머무르던 나는 끝까지 내 짐까지 다 정리해주시고 언니 오빠가 떠난 그 이후

적막한 임시 숙소 안에서 우울감을 견뎌내려고 노력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찾아오는 그 공허감, 

예전의 기억들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정말 수백번 다시 우리의 사진들, 비디오를 돌려봤고 그가 나에게

보냈던 메시지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한없이 후회했다. 

내가 과연 이때 그의 사랑에 잘 답했더라면 좀 더 상황이 나아졌을까 하는, 공허한 후회. 


하지만 나에게 아주 큰 숙제가 하나 남아있었다. 난 아직 그 집의 키를 가지고 있었고 미처 가지고 오지 못한 

내 물건들을 다시 회수해와야 했다. 발렌틴 친구에게 발렌틴의 shift를 확인 해 그가 집에 없는 시간에 난

절대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던 그 동네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그 헛헛하고 서글픈 마음은

글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안에 들어가 조용히 내 물건들을 하나 하나씩 챙기던 중 마주친 발렌틴의 플랏메이트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고 그 또한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있으니 눈치껏 얼른 방에 들어가줬다. 

내 흔적을 모조리 지우기를 끝마치고 나서 난 마지막으로 그가 줬던 모든 반지와 목걸이, 귀걸이를 

그의 책상에 키와 함께 올려놓고 나왔다. 


이제 진짜 끝났다. 

아직 너를 차단할 용기와 우리의 사진들을 지울 결심은 없지만, 어쨌든 끝났다. 

난 널 이제 미워할 마음의 틈이 생겼고 그 틈을 최대한 활용해서 널 깨끗이 지우려고 마음 먹었다. 

물론 아직도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내 마음 좀 잡아주라며 그들을 괴롭히지만 난 조금씩 그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던 중이었다. 


내가 나간 이후 단 한번도 오지 않던 문자. 당연하지만 은근히 바랬다, 적어도 내 안위는 걱정해주기를. 

아무래도 그런 문자가 희망고문일 거라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생각해왔는데

당연히 그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나도 이젠 차차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 흔적을 깨끗이 지운 그 날 밤 문자가 왔다. 


"Why did you leave them here..? I got these for you."


하, 미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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