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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Aug 08. 2023

5.최악의 크리스마스 이브.

날 쥐고 흔드는 너. 

아니 생각하면 할수록 황당했다. 헤어졌으니까, 이제 너가 준 선물들은 나에게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두고 간거지 마음 정리 차원에서. 그렇게 쫓아내고 난 후의 문자가 왜 내가 선물해준 반지랑 목걸이를 두고

갔냐고 하는거 보니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또 그 순간에 걔한테 온 문자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 내가 너무 싫었다. 그렇게 비참하게 당해놓고도 난 아직 그를 받아들일 마음의 틈을 여미지

않고 있었다. 내가 실수였다고, 내가 미쳤었다고 나한테 울고불고 빌며 돌아온다면 못 이기는 척 받아줄지도

모른다고, 그때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땐 이미 갈때까지 갔던 상황. 그가 돌아올 거라는 생각도 안했을 뿐더러 이미 이렇게 짐 다 빼고

임시숙소까지 잡은 마당에 다시 돌아갈 길은 없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들은 예고없이

찾아오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꾹꾹 누르고 참았다. 


그때의 런던을 돌이켜보면 한없이 적적했던 것 같다. 락다운이었기 때문에 연말의 설렘, 크리스마스의 축제

분위기는 거의 느낄 수 없었고 매서운 겨울 바람만 온 런던을 쏘다녔던 기억. 

그 와중에도 난 집을 찾아다녀야 했는데 이제 다시 혼자 살아야 한다는 사실과 함께 찾아오는 렌트비의 압박. 

물론 2017년보다 집 값이 오른건 기본이고 집도 별로 없었으며 난 다시 share house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추어도 없었다. 정말 백번 양보해서 부엌은 공유 가능했어도 욕실은 절대로 같이 쓰고 싶지 않았다. 

욕심은 많은데 예산은 한정되어 있으니 당연히 나에게 맞는 플랏 찾기는 하늘에 별 따기 급으로 어려웠고, 

또 영국에서도 영국인들이 가장 스트레스 받아 하는 일이 바로 '이사'인데 하물며 외국인 노동자인 나에겐

얼마나 고된 과정이었는지. 

뷰잉(집을 보러 가는 것)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지만 매번 허탕이었고 점점 지쳐가고 있던 나와 별개로

겨울의 선물같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작년처럼 발렌틴과 그의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도 해먹고 보드게임도 하며 행복하게 보냈을

테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는 외롭게 지낼게 뻔했고 난 굉장히 우울해졌다. 

그도 그럴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연중행사(?)가 크리스마스인데 그런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낼 소중한 

사람들이 없다니.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매니저 언니 오빠는 여간 내가 걱정스러운게 아니셨던지 크리스마스 이브에 

내 임시 숙소로 놀러갈테니 같이 술이나 먹자고 제안을 해주셨다. 언니 숙소와 굉장히 가까웠기 때문에

난 뛸듯이 기뻤고 언니 오빠 말고도 그 한식당에서 일하는 한 언니와 나와 동갑인 남자애 또한 할일이 

없다고 해서 조인을 했기 때문에 내 예상과 달리 꽤나 벅적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 한켠이 설레고 따뜻해졌다. 


영국의 크리스마스는 대중교통도, 마트도 정말 아---무 것도 열지 않는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을 말 그대로 '버텨야' 하기 때문에 식량을 미리미리 비축해 놓는 사람들이 많고 

그 시기의 마트는 말 그대로 사람들이 미어터진다. 손님들은 술을 사온다고 했으니 난 음식을 준비해야

해서 오랜만에 센트럴로 나가기로 했다. 센트럴 이라 함은 Oxford circus street 쪽으로, 

발렌틴이 일하고 있는 파이브 가이즈도 그 쪽에 위치해있었다. 

크리스마스 이전에 내가 처리해야 할 불편한 숙제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내가 발렌틴의 플랏에서 

놓고 온 물건을 받아야 했다. 사실 지금은 그게 무엇이었던건지 생각나지 않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받아야 겠다고 생각했던 거 보면 그 당시엔 중요한거 였겠지? 

물론 난 발렌틴을 마주할 용기도, 의욕도 그리고 마음도 없었다. 이럴 땐 그의 플랏메이트들이 쓸모(?)가

있었던게 플랏메이트에게 내 물건을 가져다 줄 수 있냐고 개인적으로 연락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들의 집의 쉐어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뿐이지 그들을 사람대 사람으로 싫어했던 것도

아니었고 나쁜 아이들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나온 것에 대해서

미안하기도 했던 찰나, 그들에게 미안함도 전할겸 내 물건도 받을 겸 해서 그에게 연락했다. 물론 이것조차

그때의 나에겐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락다운 때 파이브가이즈는 take-away는 가능했기 때문에 운영을 했고 마침 12월 23일에 그가 일을 한다고 해서 타이밍도 맞겠다 그와 몰래 약속했다. 


난 몇번 강조했다, 절대 발렌틴한테는 말하지 말아달라고. 내가 그래서 이런 부탁 너한테까지 하는거라고. 

그만큼 보기 불편한 사이가 되어버렸기도 하고 내 자존심상 이제 더 이상 내 얼굴을 그에게 내비치기 싫었다. 

어차피 안 볼거였지만 그래도 혹시나 마주칠까 얼마나 떨리던지. 난 발렌틴이 그 날 일을 하는지 안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파이브 가이즈 옆에 몰래 몸을 숨긴 후 그 친구가 나오는지 안나오는지 지켜보고 있는데


발렌틴이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심장이 정말 쿵-하고 내려 앉는 듯 했다. 2주 정도 못봤지만 역시나 아직까진 나에게 너무 익숙한 그가 

꽤나 미묘한 얼굴을 하고 걸어왔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포커페이스를 하고 아무 말 안한 채 그가 건네준 것을 받았다. 

정확하게 그때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 지는 솔직히 기억 나지 않는다. 비스무리하게 기억해 낼 수 있는건

'왜 반지를 놔두고 갔냐', '잘 지내고 있는 거냐'  등등. 

허나 정말 정확하게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 건 그가 또 내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무책임하게 당겨놨다는 점. 

그렇게 당해놓고도, 난 다시 그가 돌아왔으면 했었고 아직도 미련하게 그의 따뜻한 눈빛을 갈구하고 있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사실을 난 역설적으로 체험했다. 눈에 보이니 다시 내 마음으로 

들어오는 구나 하고. 

우린 그 상황에서도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며 살짝의 의견충돌이 있었지만 그때의 나에게 그건 서로를

못 잊어서 서로에게 어리광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난 나에게서 그걸 느꼈고 그에게서도 느꼈다. 

파이브가이즈를 떠나서도 머릿속은 복잡했고 마음속은 그 복잡함으로 묘하게 들떴지만 또 동시에 

객관적으로 그의 행실을 바라보게 됐다.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그가 다시 나한테 미련이 생겨 돌아온다고

해도 우리의 관계추를 바로 잡고 가야 할 필요를 난 절실히 느꼈고 정말 길게, 내 열과 성을 다해서

그에게 내가 느낀 우리 그리고 너를 메시지를 통해 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의 마음은 내 추측과 달리 열린게 아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다정함이 눈속임을 한 것뿐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나를 대차게 까버렸다. 


'널 이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건 사실이야, 그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는 것 같아.' 라고. 


왜 내가 또 다시 얘한테 차여야 하는거지? 

그래도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그를 잘 잊어가고 있었다는 자부심(?), 그리고 영국에서 나 혼자서도

날 잘 챙길 수 있을 것 같다는 나름의 의연함과 더불어 크리스마스에 아무 생각 말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했던 내 기대감은 23일 말 그대로 와르르 하고 무너져버렸다. 

내 친한 친구한테 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도대체 왜 그런 문자를 보냈냐고. 그녀의 걱정어린

질책이 차라리 나았다. 언니 오빠는 듣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셨다. 걘 도대체 왜 그런다니? 

왜 잘 혼자 정리하고 있는 애 눈 앞에 나타나서 마음을 헤집어 놓고 가는거냐며, 널 얼마나 만만하게 보는거냐면서. 언니는 나보다 더 분노해주셨다. 


그 날 이후로 난 완전히 그에게 연락을 끊었다. 

더 이상 너에게 그 어떠한 틈도 보여주지 않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와중에 그를 차단할만큼의 마음은 서지 않았지만, 그에게 내 소식이 조금이라도 알려질 수 있는 통로는

모조리 끊어버렸다. 모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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