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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Aug 10. 2023

7.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

모순.  

정말 솔직히 말하면 받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난 이 연애를 통해 한가지 조금이나마 깨달은게 있다면 절대로 절대적인 감정은 없다는 것. 

내가 그걸 몸소 느꼈기때문에 나도 누군가에게 사람의 감정을 말하는 데 있어서 확실한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99.99%라고 해도 0.01%를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사람은 유일하게 '모순'적인 그 어떤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 같다.

맞다, 사실 전화를 받고 싶었던 그 마음이 그때는 용납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 연락했을까 하는 궁금함보다는 일단은 단순히 연락에 응하고 싶기만 했다. 아직 너와 나는 조금의

가능성이 다시 있다고 암묵적으로 표하고 싶었다고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난 아직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가 저지른 만행(?)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고 전화를 받아 답을 듣기 이전까지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모험보다는 나를 지키기로 했다. 더 이상 내 맘에 상처를 내는 걸 가만히

두다가는 내가 와르르 하고 또 한번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에. 


끝끝내 나는 받지 않았다. 

그의 연락을 기다리며, 매번 재회타로에서 그가 나한테 용서를 구하고 돌아온다는 타로를 기다리며 유튜브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나는 모순적이게도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또 웃기게도 괜히 이긴 느낌이 들었다고 하면 내가 너무 속물인걸까? 유튜브에서 많은 연애코치 들이 말했던

것 처럼 남자들은 연락을 딱 끊어버리고 내 소식을 절대 알지 못하게 하면 연락 한다던데 진짜였네 싶었다. 

끊어진 전화를 붙들고 이게 과연 맞는걸까 수백번 생각했지만 친구들에게 연락해 일부러 걔 욕을 더 해달라고

했다. 내가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바라 볼 수 있게. 난 적어도 당분간은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을 거니까. 

우리들의 이야기를 말로만 들은 타인들에게는 내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랑을

끝맺는 방식이 거지같은 애한테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을 수 있냐고. 

물론, 성향 차이로 누군가에겐 가능할 수 도 있는 거고 그들의 생각도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적어도

'나'란 사람은 그렇지 못했고 그렇지 못하다. 이 이야기는 말 그대로 '우리의 이야기' 였고 그 안에 수많은, 또

깊은 레이어들이 너무 겹쳐져 있어 그 레이어를 통한 우리의 감정의 깊이는 나와 그조차도 모르는 우리의 

무의식을 건드려 오롯이 이성적으로만은 행동하는 걸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그라고 과연 그에겐 전화하는 것이 쉬운 결정이었으랴. 지가 그렇게 내쫓은 데 모자라 연락도 한번을 안하다가 지금 연락을 하면 내 입장에선 아쉬우니까 연락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라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런거 일일이 다 따지지 않고 나에게 다시 다가오기로 한 그의 결정 또한 결코 쉽지 않았을 터. 


우리가 같이 보냈던 그 시간들의 깊이는 우리가 겪은 이별의 무자비함보다 셌고 시간의 부피는 이별 한 후에

각자의 속 안에서 더 팽창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난 이별을 통보 받았기 때문에 팽창하는 부피의 압력을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었던 걸 테고. 

발렌틴과 제일 친했던 내 제일 친한 친구는 고맙게도 발렌틴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은 지양하고 우리의 지금 

상황만을 똑바로 바라본 채 조언 해줬다. 물론 내 친구니까 그를 아예 욕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발렌틴의

행동도 이해를 하는 것에 기반한 그녀의 말은 나에게 더 신뢰를 줬고 난 더 흔들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임시숙소는 혼자 살기에 너무 좋았지만 vauxhall 쪽에 있는 아파트 비슷한 건물로 듣기에는 우리나라의 

타워팰리스 급의 명성을 가지고 있는 건물이었고 당연히 비쌌다. 

여기서 더 오래 머물렀다간 내가 렌트비를 감당할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게 됐기 때문에 급하게라도 putney

쪽에 있는 한 집을 임시방편으로 선택하게 됐다. 

한달에 650파운드, 지금의 환율로 치면 109만원정도 였는데 뷰잉을 보러 갔던 날의 날씨가 좋아서 그랬는지

그나마, 정말 그나마 가장 나은 것 같았다. 방이 꽤 넓었고 제일 맘에 들었던건 TV가 있다는 것. 

난 소리의 부재를 굉장히 곤란해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에게 TV가 딸려 있다는 건 내가 가지고 있는 나만의 특별한 우선 순위 조건이었는데 이 방이 TV를 가지고 있었다. 부엌의 위생 상태가 아주 조금은

걱정됐지만 일단 지금은 그런 거 따질 필요 없이 방을 구해야했고 또 가장 맘에 들었던 건

Deposit, 그러니까 보증금이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짧지만 정들었던 임시숙소를 뒤로 하고 난 이사를 갔다. 그래도 나름 살림살이가 좀 있다고 은근히 

무거운 게 많아서 이사를 걱정했는데 또 한번 난 매니저 언니 오빠의 도움을 받았다 감사하게도. 언니 오빠는

내가 이사 가는 곳까지 우버를 타고 같이 가서 짐도 옮겨주시고 동네도 한번 돌아봐주셨다. 정말 그분들께

신세 많이 졌다. 영국에 정말 오래 사신 언니 오빠도 이사라면 이골이 난 상태라고 할 정도로 집을 많이 

보셨었는데 내가 이사 들어간 방을 보고 이미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짐이 깨끗이 비워진 방을 보니 생각보다 더 가관이었던게 방의 벽에 곰팡이 자국이 굉장히 진했고, 더 최악은

주방의 위생상태가 말을 못했다. 어차피 밥 해먹을거 아니어서 크게 신경 안쓰려고 했는데 막상 보니

수납장안에 가재도구들만 엄청 많지 그 가재도구들은 너무나 더러워서 내가 도저히 쓸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갑자기 후회감이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이미 엎어진 물,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노릇. 


언니 오빠가 떠나신 후, 난 내 방과 냉장고를 깨끗이 청소했다. 다행히도 그 집에서 같이 사는 flatmate는

딱 1명이었는데 그 1명도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는 듯 해서 그거 하나는 좋았다.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보자! 했던 것도 잠시, 

락다운이라 거의 방에만 있어야 했고 또 겨울이라 난방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난방이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난 그 방에서 이불을 덮고 틀어박혀 덜덜 떨며 지냈는데 그게 어찌나 서럽던지. TV만 있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었고 그 전 숙소랑 너무 차이가 나서 그런지 더 서글프고 내 맘은 더 약해졌다. 

그리고 내가 약해진 걸 증명하듯 당연히 머릿속엔 계속 발렌틴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던게

그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 때문에 내가 이런 겪지도 않아야 할 시련을 겪고

있는 것만 같았고 배신감마저 들었다. 

너가 내가 오는 것까지 고려해서 살 곳도 정해놨다고 하더니 내 꼴이 이게 뭐냐고 바득바득 따지고 싶었다. 

사람과 사람이 헤어지는 데는 절대 한쪽의 잘못만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지만 그때는

그냥 다 걔 잘못으로 돌리고 싶었다. 억울하고 미웠다. 


그런데 아마 누군가 나에게 인생은 끝없는 모순의 역설이란 걸 말해주고 싶었던 걸까,

또 다시 발렌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또 다시 전화를 걸어왔는데 정말 그때는 이미 

통화버튼을 누르기 딱 그 직전까지 가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상황에서 그의 전화는 나를 구원하러 온 

것만 같았고 날 이렇게 만든 건 그라는 실망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다. 

끊어져버린 전화를 두고 '이게 맞는거야' 라며 강제적으로 자기 암시를 하고 있던 찰나, 문자가 왔다. 

이번엔 전화에서 단순히 끝나지 않았고 그는 


'왜 전화를 안받아? 한번만 좀 전화 좀 받아줘' 라고 했다. 

주변환경은 사람의 심리에 영향을 주고 나 또한 절대 예외가 아니었다. 만약 그 전의 럭셔리한 임시숙소

였다면 이 문자에 답조차 하지 않았을 거지만 지금 상황에선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없는 텍스트는

내가 답장을 해도 크게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난 답장을 보냈다.


'너 지금 어디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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