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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Aug 13. 2023

9.재회

2달만에 만난 그. 

난 잘 살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행복까진 아니었어도 점점 적응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힘들때나, 슬플때나 매번 듣는 그 해결책, 시간이 약이라고. 

시간이 약이라는 것만큼 명쾌한 해답은 없지만 또 그것만큼 답답한 해결책도 없는 거, 그렇지만 시간을

어찌할 도리가 없기에 그 시간을 조금만 감내하고 견디면 정말로 조금씩 조금씩 약효가 돌면서

우리의 상처를 무뎌지게 해주는 것처럼 나도 그런 상태였다. 가끔씩 그가 생각나서 아침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밥을 준비할 때든, 수업을 준비할 때든, 밥을 먹을 때든, 설거지를 할 때든, 식료품을 사러

잠깐 나갈 때든, 논문을 준비할 때든. 언제 어디서든 그는 불쑥 찾아와 내 마음을 쾅쾅 하고 두드렸지만

내가 어쩔 도리가 없는 차원의 감정이었고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시간에 맡겼다. 시간이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아 답답해 미치겠었지만 어쩔 수 없었고,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난 어느샌가 그냥 그렇게, 어떻게 어떻게 지내고 있었다. 

너가 그렇게 수없이 두드렸지만 잘 참아왔던 나도 어느 정도 대견했었고. 이젠 진짜 괜찮다고 난 그렇게

착각했다. 착각했고, 착각한 척 하고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 그랬다. 


누군가 날 비난하면, 나도 내 감정을 간과했었다고 그래서 만났는데 그게 내 실수였다고 말 할 

합리적인 근거가 생기니까. 착각 한 척, 못 이기는 척, 이제 진짜 걔를 만나도 나 전혀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만났던 거라고 변명 할 수 있으니까 애써 의연한 척 했던 것도 맞다. 

1달이나 지난 이 시점에 너 없이도 잘 지내고 있는 나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더해 그의 절절한

고백에서 이미 걔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고 싶어한다는 확신이 날 더 그에게 답장하게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난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던 지도 모른다. 다시 우리 관계의 무게추가 내 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그가 나에게 쩔쩔매는 것을 보고 싶었다고 하면 너무 나 못된걸까?


한번만 만나자고, 한번만 만나달라고 부탁하는 그의 문자에 처음엔 차갑게 대꾸했지만, 너한테 

너가 놓고 간 내가 준 선물들은 다시 돌려주고 싶고 그러니까 한번만 봐달라는 그의 부탁에 못 이기는 척

난 내 집주소를 알려줬다. 


그리고 그가 오기로 한 날. 

은근히 심장이 콩닥 거렸다. 매번 봤다가 딱 1달 보지 않았던 거라도 관계의 속성이 달라진 지금,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느낌 자체가 달랐다. 내가 사는 플랏의 위치가 좀 복잡해서 결국엔 내가 내려가서

그를 맞이해야 했는데, 

저기서 보이는 그의 얼굴. 변함없었다. 변함없이 그였다. 내가 아는 그. 

조금은 슬퍼보이는 눈과 함께 애써 웃음 지으려는 그의 얼굴을 보고 난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밖이 추우니까 얼른 들어오라며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앞질러 문을 얼른 열어줬다. 


느릿느릿 걸어와 집 안에 들어와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 어떤 의도로 날 그렇게 보고 있는지 모를 리 

없었지만 알면서도 '왜?' 하며 짐짓 모른 척, 질문으로 응수했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다단한 감정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는 듯 했고 나도 말로 할 수 없었지만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눈빛을 가만히 받았다. 

"잘 지냈어?"

몇 분의 침묵과 응시 후에 툭 하고 조심스레 나에게 던진 그의 질문에 난 태연하게

"응, 난 잘 지냈지. 넌?"

이라고 물었다. 

"난 못 지냈어. ... 정말 미안했어, 그리고 미안해 아직도."


그에게 헤어진 직후부터 듣고 싶었던 말이 사과의 말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심 어린 듯한

사과는 내가 겪어온 짧지만 무던히도 길었던 그 1달의 시간을 다시 돌이켜보게 했고 갑자기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꾹 하고 참았다. 그의 말에 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던 것 같다.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날 바라보던 그는 나와 유지하고 있던 멀찍한 거리를 좁혀

걸어오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내 눈치를 슬쩍 보는가 싶더니 나를 안았다. 아주 꼬옥 안아주었다. 

정말 다행인건 내가 그때 신파극을 찍지 않았단 건데, 힘들었다고 너가 오기를 기다렸다며 펑펑 울지 않았던

내가 자랑스럽다. 그냥 가만히 그의 포옹을 받아내었고 그가 다시 포옹을 거두고 내 눈을 바라볼 때까지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그 후, 발렌틴은 어떻게 지냈는지 나한테 물었고 난 간단히 이렇게 지내왔었다고 짧게 말해줬다. 

내가 말할동안 그는 단 1초도 나에게 눈을 떼지 않았으며 가끔씩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말을 하다가 잠시 격해진 감정의 나를 마주했을 때에는 발렌틴은 죄 지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고 난 그게 더

미웠다. 내 얘기를 마치고 넌 왜 나한테 연락했느냐고, 넌 잘 지내고 있지 않았냐고. 너가 연락이 와서 

난 사실 정말 놀랐다고 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내 예상과 다르게 그는 많이 우울했고 날 하염없이 걱정했다고 했다. 너와 연락이 닿지 않는 순간부터 

친구들과 즐겁게 얘기해도 그 순간은 잠깐일뿐, 집에 같이 있던 내 모습이 선해서 너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며

크리스마스랑 새해는 너가 잘 보내고 있는지 걱정이 됐다고. 그래서 연락했던거구나. 


그는 오전에 와서 저녁까지 머무르다 갔는데 나에게 저녁을 해주고 싶다고 같이 장을 보러가자고 했다. 

근데 정말 웃긴건, 발렌틴과 장을 보러 가는데 너무 행복했다. 그와 헤어진 후 매일 혼자 식료품을 사러 가던

그 길을. 항상 혼자 돌아다녀야 했던 그 길을 이제 날 지켜주는 것 같은 사람과 같이 걸으며 저녁 거리를 사러

가는 것 자체의 의미가 나에겐 너무 컸다.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그 날, 그 시간이 얼마나 따뜻하던지. 다시금 연애 초기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내가 뭔 말을 하건, 뭔 행동을 하건 그 날의 발렌틴은 날 극도로 소중해 하는게 느껴졌고 난 또다시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기분에 빠져버렸다. 

누구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커플처럼 저녁거리를 사서 그는 정성스레 나에게 저녁을 차려줬고 우린 저녁을

행복하게 즐겼다. 1달만에 찾아온, 아니 1달이 뭐야 거의 2달만에 찾아온 날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과의

식사였다. 


하지만 그 저녁 식사도 잠시. 이젠 발렌틴이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물론 난 아쉬움은 1도 없어야 했으며 그렇지 않아도 그런 척을 무진장 해야 했지만 그게 생각보다 되지 

않아 맘 속으로 날 엄청 자책했다. 슬슬 그가 떠나야 할때부터 우리 사이에는 뭔지 모를 어색함이

감돌았는데 아마 이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에 물음표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는 먼저 용기내어 나에게 간접적으로 그의 의사를 전달했다. 

정확하게 그가 어떻게 말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이미 너에게 만나자고 연락 한 것 자체부터

너랑 다시 만나려는 마음이었었다고. 사실 그 말 하려고 이렇게 온거고 이미 내 마음을 확정 짓고 온거라고. 

나도 그의 의도를 아예 예상 못했던 건 아니지만 난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내 진짜 마음은 당연히 그에게 응하고 싶었다. 이미 그를 본 순간부터 내 마음은 넘어간거나 마찬가지였다. 

표면적으로는 너 없어도 잘 살고 있다고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었던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사실은

그가 그냥 보고 싶었다. 다시 날 보고 싶어하는 그를, 날 애틋하게 여기는 그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그 날 전체를 애틋함으로 대해줬고 내 마음은 이미 그에게 넘어가 있었지만

쉽게 응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나의 이별로 날 도와줬던 분들의 마음을 내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본인들의 집에서까지 날 재워주고 임시 숙소를 찾아주고 이사까지 도와주신 매니저 언니 오빠의 낯을 볼 

용기가 없었고 한국에서 날 걱정하느라 잠 못잤을 엄마를 생각하면 염치가 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얘한테 yes를 해버리면 단순한 우리들의 사랑장난에 그분들을 놀아나게 한것만 같았다. 

이건 단순히 오랜만에 봤던 것에 대한 반가움일거야 라고 나에게 반복해서 되뇌었고 난 어려웠지만, 정말 

죽을 듯이 어려웠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나의 거절을 예상하지 못한 그는 꽤나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거기서 내가 해 줄수 있는 건 더이상 없었고 나도 아직까지도 내 결정이 맞는지

혼란스러웠으나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는 체념 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른 후 그가 이제 집으로 그럼 가보겠다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그에게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지금 밤이 너무 늦어서 그런데, 나 하루만 그럼 자고 가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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