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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Aug 13. 2023

10.너의 연락을 받은 내 잘못.

역시 난 약한 사람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고 가겠다니. 다른 뜻이 있는게 아닌건 알았지만, 태연하게 대답을

해줄 물음은 아니었기에 잠시 벙찐 채로 있었지만 그는 그래도 가만히 내 눈을 쳐다본 채 기다렸다. 

그리고 내가 거절할 수 있는 한도는 딱 한 번이었다. 더 이상 거절할 의지가 내겐 남아있지 않았다. 

처음 했던 거절도 쥐어 짜내고 짜내서, 오로지 날 챙겨줬던 가족과 내 사람들을 위해서 내 마음을 쪼매고

쪼매어 가까스레 내뱉을 수 있었던 NO 였는데. 그는 다시 한번 너무도 쉽게 내 의지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난 또 다시 '그래, 밤이 늦었으니까. 그러니까 재워주는 거야.' 라는 변명에 다시 숨었고,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 우리는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도 그렇고 그도 그렇고

크게 잠을 청하려고 노력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서로 말은 안했지만 그 시간을 그냥 보내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평범하게, 와인 한 잔 홀짝이며 영화를 봤고. 다시 또 만날 사이인 것처럼 밤 인사를

하고 자러 들어갔다. 

발렌틴은 다음 날 일찍 일하러 가는 오전 shift 였기 때문에 빨리 집을 나서야 했는데 난 그게 못내 아쉬웠다.


당연히 자고 일어나니 그는 가고 없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이 내 마음을 꽉 채웠고

멍한채로 쇼파에 앉아 있다가 부엌 쪽으로 갔는데 테이블에 그가 두고 간 쪽지가 놓여있었다. 

그 쪽지 옆엔 내가 한사코 다시 받기를 거부하던 그가 예전에 나에게 줬던 반지, 목걸이, 귀걸이 등이 있었고

'이건 어차피 너 거였으니까 너가 가져. 너 거야.' 라고 쓰여 있었다. 

발렌틴이 떠난 이후 그 날 하루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해도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요리를 해도, 논문 주제를 잡으려 리서치를 해도, 청소를 해도 어제 그와 보냈던 시간의 여파는 내가 상상한

훨씬 그 이상이어서 내 하루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거기에 내 미련을 부추기는 데 한 몫 했던 그의 문자. 

잘 일어났냐는 아주 일상적인 문자였지만 다시 연락을 하게 되었다는 것에 의미가 부여된 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답을 했지만 그 후 그는 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난 그의 답을 바라고 있었는데, 그래서 이 문자가 좀 더 이어지다가 '나 오늘도 너 만나러 갈까?'

라는 문자로 자연스레 흐르길 바랬는데. 난 못 이기는 척 그러라고 하려 그랬는데. 

그의 shift가 언제 끝나는지 잘 알고 있는 나는 끝나고 남았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답장을 하지 않는 걔에게

실망했다가, 미쳤다고 나를 자책하다가 또다시 기다리다가 했다. 


내 감정이 도대체 어디로 왔다갔다 할지 몰라 난 조마조마 했다. 이성적으론, 머리론 당연히 그에게 

연락을 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 하루 내 옆에 발렌틴이 있었다는

그 사실이 오늘 왜 이리도 나에게 큰 상실감을 가져다 주는지. 나도 내가 싫었지만 이 상실감을 주체 할 수

없었고 그 날 밤은 유독 길었다. 욕 먹을 게 뻔했지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가장 친한 친구한테 

실토했고 그런 나를 친구는 나무라지 않았다. 당연히 내가 걱정됐지만 내 친구는 내 의사를 존중해줬다. 


어떻게 어떻게 그 날 하루는 꾹 참았는데 그 다음날까지도 이 공허감은 쉬이 가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나면서도 머리론 그에게 무슨 빌미로 다시 연락을 해야 하지 라는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노력의 끝은 그를 생각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걸 막을 수 없었고 결국 다 씻고도 TV 앞에 앉아 번뜩번뜩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선, 난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 들었다. 

난 이번엔 술을 타겟으로 잡은거다. 내 약한 의지의 핑계가 될 술을. 어느 포인트부터 난 내 행동을 합리화

시켜줄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는 데 맛이 들려있었고 이번엔 술이었다. 

술을 적당히 마시면 적당히 나를 놔 버릴 수 있고, 평소 같으면 자제할 행동도 술은 아주 가볍게 내 고삐를

풀어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며 내가 자주 이용하는 만만한 게 술이었다. 

그 날도 역시나 였다. 술을 마시면 난 조금 텐션이 높아질 테고 지금 간신히 붙들고 있는 이 의지를 술을 

마셨다는 핑계로 놔 버릴 수 있을테고, 그럼 아주 많이 취한 척 그에게 정신 없는 척 하며 오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질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난 술을 들었다. 


그런 치밀한 계산이 있었다. 난 날 보호할 명분이 필요했다. 이렇게 바보같이 한번 먼저 연락왔다고

갈대처럼 마음이 흔들려 홀랑 넘어가는 날 보여줄 만큼의 불필요한 용기는 없었다.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술을 꽤나 빠르게 마신 나는 당연히 술 기운이 일찍 돌았고, 뭐하냐고 아무렇지 않은 척 문자를 보냈다.

그는 바로 답장을 했고 다행히도(?) 일 하는 중이고, 일이 곧 끝날 거라고 하는 그의 답장에 난 

애써 기쁨을 감추며 '그럼 올래?' 라고 문자했다. 

그는 바로 오겠다고 답했고 난 그때부터 술 기운이 더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날 아껴주는

사람이 온다는 그 사실이, 외로운 내 옆에 따뜻한 온기를 가진 채 날 보듬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올 거고 또 그럴 의지가 충분히 보인다는 그 생각은 날 들뜨게 했다. 

그가 오기 직전까지도 난 일부러 술을 더 들이켰다. 맨 정신으로 그에게 연락을 했다는 걸 보여주는건

죽기보다 싫었고 그가 도착했을 때 난 약간 알딸딸 해져있었다. 


지금 이렇게 그 때를 돌이켜 볼 수 있을 만큼 정신은 있었지만 그에게 좀 더 가드를 내리고 대할 수 

있을 만큼의 취기였고 난 그 취기를 백분 이용해 그에게 친근하게 대했다. 

이미 술 기운이 오른 나의 모습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그다지 크게 당황 한 것 같지는 않았고, 왜 오라고

했냐는 그런 진부한 질문 따위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때 했던 명확한 대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만큼은 기억 난다. 너 가고 나서 사실 나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고. 나도 속으로 너가 많이 그리웠나보다고. 내가 널 거절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고.

솔직히 털어놓는 나를 보면서 그는 생각이 많아보였다. 특히 우리 엄마를 말할 때의 부분에서 그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어했지만. 

그 말을 한 이유도 난 이래서 널 거절하고 있는데 그래도 내가 거절 못하게 좀 더 적극적으로 다시 만나자고

나에게 말해줬으면 좋겠단 생각에서 그 말을 꺼낸 거였다. 내 행동의 패턴이었다. 누군가의 탓을 할 수 있게

미끼만 슬슬 던지는 비겁한 의도를 가진. 


그는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날 강요할 생각도 절대 없고 그럴 양심도 없다고 그랬고, 

그의 말을 듣자 난 더 조급해졌다. 내가 그러기엔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너가 이 관계를 다시 되돌리기 위해

강하게 나와야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건데 발렌틴은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발렌틴은 이미 내가 다시 그에게로 올 거라는 걸 예감하고 있는 듯 행동했다. 근데 아마 

나라도 그때의 나를 봤다면 그랬을거다. 나라는 사람을 A부터 Z까지 다 꿰고 있는 그인데, 우물쭈물대는 

나에게서 설마 내 그런 마음을 눈치 못챘을까 싶다. 


늦은 시간 도착했던 발렌틴은 역시나 우리 집에서 하루를 더 지새고 갔다. 그 다음 날 쉬는 날이었던 발렌틴은

우리 집에서 아침까지 먹고 나랑 같이 장도 보고 늦은 오후가 되서야 집을 떠났다. 

그가 머무는 시간과 내 미련은 얄궃게도 너무 비례했고 그에게 기우는 내 마음을 잡을 수 없었던 나는 이제 

좀 더 자주 자주 그가 먼저 연락하지 않아도 연락을 먼저 취하곤 했고 그는 아무 토도 달지 않고

나를 만나러 찾아오곤 했다. 



우린 다시 만나자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았을 뿐이지, 이미 재회의 불씨는 당겨진 느낌이었다.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으며 서로에게 좀 더 조심스러워지고 배려하게 되는 걸 보면서 난 점점 더 

희망을 가지게 됐다. 우리가 겪었던,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겪었던 그 최악의 이별은 잠시 

내게 던져준 조금은 과했던 교훈이었던거라고. 그를 좀 더 소중하게 여기라고 잠시 하늘에서 벌처럼 내려준, 

사촌언니가 말하던 Karma를 몸소 한번 느껴보라는 벌칙같은 것이었다고. 

기억은 미화된다고, 내가 그리도 힘들었던 그 지난 날들은 잊고 다시 한번 내가 얘를 믿고 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큰 착각에 빠졌었다. 

그래,결국엔 연락을 처음부터 받은 내 잘못이었다. 모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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