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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Aug 15. 2023

12.코로나에 걸린 엄마 때문에 널 볼 수 있다니.

나 진짜 불효녀 같다. 

그 이후 난 식음을 전폐..까진 절대 아니고 한번 겪어봤던 헤어짐이라서 그런지 그 전처럼 충격에서 

해어나오지 못해서 힘들고 그렇진 않았다. 하지만 그 끝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진도는 그 어떤 것보다

높았다. 처음에 헤어진건 홧김에 헤어질 수 있던 거라고 백번 양보해서 생각할 수 있다 쳐도, 이번 건

다시금 우리 관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확인하고 다시 한번 이렇게 결정한거라. 

이젠 일말의 희망 같은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싸웠던 그 날 다시 한번 우리는

우리 서로를 얼마나 존중하지 않아왔던가, 그리고 그에 대해 연습이 되어있지 않던 우린 단순히 

헤어짐이라는 사실로 그걸 습득하기엔 미숙했고 또 너무 이른 재회였다고, 난 이젠 그렇게 생각한다. 

당연히 마음 한 켠에는 그가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외로울 때마다 그에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단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우린 다시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시 싸웠고, 다시 실망했고, 다시 똑같은 결정을 반복했다. 


차라리 펑펑 울면서 걔를 미워하던 그 때가 더 나았던거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이별엔 절대 익숙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처음 이별은 걜 미워하면서 욕할 수 있었고 또 한 편으로 남 몰래 그가

돌아올 가능성이라도 따져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눈물만 덜 났지 이번 이별의 밀도는 훨씬 높았고

그가 나를 한번 더 겪고 나서 결정한 것이기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정말 연락 오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날 더 우울하게 했다. 내 부족한 필력으로 그때의 감정을 충분히 묘사할 수 없어 답답하지만, 하여튼

이제는 그가 다시 연락이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아서 더 답답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점점 봄이 다가오고 있었고 날씨는 점점 이쁘게 치장을 하고 런던을 돌아다녔다. 따뜻한 햇살이 

런던 전체를 데워줄 때면 런던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날씨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기에 공원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나가서 따스함을 즐기곤 하는데, 난 그런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지금이라면 마음의 여유가 생긴 상태니까 혼자서 공원에서 책도 보러가고 나만의 시간을

즐기겠지만 그땐 여러모로 마음에 가슴이 숭숭 뚫린 상태였기도 하고 아직도 난 상실감에서 허우적

대고 있었기 때문에 어두운 굴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 어딘가를

갈 때마다 남의 시선을 의식했고, 남들이 다 내가 혼자인 것을 의아해 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물론, 아무도 날 신경쓰지 않았음이 분명하지만 당시의 나로선 같이 만날 친구가 있지 않으면 식료품을

사러가는 것 외엔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아직도 그때의 그 기분이 선명하게 나에겐 남아있다. 난 감정과 대비되는 상황에서 오는 그 모순이라는 

것에 느끼는 흥미가 큰 편이다. 예를 들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이라던가 아니면 쉬운 예로

박진영의 노래 중에 '대낮에 한 이별' 같은 것. 또는 봉준호의 '기생충'에 나오는 아주 밝은 날 아래 벌어지는

살인 사건마냥. 보통 맑은 날씨에 비례한 기분의 상승은 쉽게 생각 할 수 있는 상관관계이지만 

그건 나처럼 이별을 겪은 사람들에겐 매번 적용되는 공식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랬고 그래서 그 때의 그 날들이 더욱 더 선명하고 저릿한 기억으로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날씨는 그때의 나에겐 참 얄궃었다. 그냥 원래 너네가 그랬던 것처럼 영국에서 비라도 좀 내리지, 구름이라도 

껴서 좀 우중충해버리지. 그럼 그 날씨에 기대어 내 기분을 날씨 탓이기라도 한 것처럼 묻어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날씨가 좋아버리니 내 기분은 오롯이 내 탓이란 걸 깨닫게 되버리는게 그리도 야속했다. 


물론 발렌틴에게 연락은 그 이후 오지 않았고, 난 또 습관처럼 타로를 봤다. 이번엔 절대로 그가 연락을

주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젠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봤다. 맞다 안 맞다가 중요했다기 

보다 누군가가 그냥 그럴 거라고 근거가 없더라도 좋으니,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랬다. 

발렌틴은 자기 친구들이랑 이 날씨를 즐기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고 있겠지 생각하니 더 우울해지고

또 어쩔 땐 부아가 치밀었다. 왜 지가 다시 시작하자고 해 놓고 이걸로 또 날 두번 상처를 줘? 싶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는 객관적으로 그의 잘못도 되돌아 볼 수 있었지만 그땐 일단 위로가

급했고 발렌틴의 따뜻한 모습이 필요했기 때문에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하며 날 탓하는 데 더 치중했던 것

같다. 이미 그와의 관계에서는 이성적인 모습으로 뭔가를 할 수 없었다. 


친구는 날 위해서 '먼 훗날 우리'라는 영화를 추천해줬다. 그거 보고 펑펑 울면 그 답답함도 좀 가실거라고. 

보면서 너랑 걔같더라 라는 말을 하길래, 난 곧바로 밤에 그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말 그대로 통곡을 했다. 

물론 우리가 그들처럼 어떤 현실의 벽에 부딪혀 헤어짐을 택해야 했던 상황은 아니었을지라도 젊은 시절, 

오로지 서로만 바라봐도 행복했던 그 날들의 찬란함도, 그리고 그 반짝반짝함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바래진다는 것도, 그걸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 것에서 끝날 수 밖에 없다는 때가 있다는

걸 아는 것도. 너무 공감이 가서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면서 영화를 봤다. 누가 툭- 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통화 버튼을 눌러 그에게 연락하고 싶을 만큼 그리움은 내 마음을 꽉 채웠다. 


그러나 이런 감상을 비웃는 것처럼 시간은 빠르게 전진했고 숙소 계약기간인 3달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사를 어디든 가야 했던 나는 또 집을 사냥하러 다녀야 했고 또 한번 감사하게도 매니저 언니가 많이 

도움을 주셔서 Pimlico쪽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En-suite 방으로 내 전용 화장실이

딸린 공간이었고 집값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땐 그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이사 가기 전날, 이젠 행복한 일만 일어날거야. 이 무던히도 우울했던 날들은 지나가고 락다운도 곧 

슬슬 풀릴 기미가 보이고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이 해를 잘 지내가 보자! 라며 호기롭게 

마음 먹고 있던 그 시점. 예상치 못한 순간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별다른 생각없이 전화를 받았는데 비디오 안에 비친 엄마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고, 병원인 듯 해서

너무 놀라서 뭔일이냐고 물어보니 코로나에 걸렸다고 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가 아무리 감기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3년 전인

2020년은 코로나에 걸리면 큰 일이 난 걸로 취급되어 지는 시기였고 코로나는 폐 쪽을 썩게 한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며 코로나에 관한 괴소문이 무성했었는데 그럴 때 우리 엄마가 코로나에 걸리다니.


나에겐 정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아빠를 뵈러 잠시 인도에 계시던 상황에서 코로나에

걸린 것이라 더욱 더 걱정됐다. 물론 아빠가 엄마를 잘 돌봐주실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고, 엄마의 표정은 나에게 비통해보이기까지 했다. 난 그 말을 듣자마자 울음을 터뜨렸고 통화가 

끝난 이후에도 왜 도대체 나한테 이런 일들만 일어나는 거냐며 대상 없는 원망을 하기도 했다. 

도대체 이번 년도에 마가 낀건지, 헤어지지를 않나 락다운 때문에 이사를 이리저리 다녀야 하지 않나, 

엄마가 코로나에 걸리지를 않나. 새로운 결심은 온데간데 없이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고, 난 도저히 

이 감정을 혼자 처리할 수가 없어서 매니저 언니께 전화했다. 언니도 적잖이 놀라신 눈치였지만 날 위해

차분하게 내 감정을 정리해주셨고 난 조금 진정 된 후 였지만 그래도 이 불안함과 억울함은 쉬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난,.. 예상할 수 있듯이 그에게 문자했다. 

그에게 문자해도 될만한, 저번에 말했던 술처럼, 또 다시 연락할만한 핑곗거리를 난 잡은 것이다. 

난 진정된 감정을 좀 더 극대화 시켜 문자했고 그는 바로 괜찮냐며, 어머니는 진짜 괜찮으신 거냐며 바로 

걱정 어린 문자를 보내더니 우리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예상치 못하게 이른 목적 달성(?) 이었고 난 그때 그 순간 나에게도 거짓말 하느라 바빴다. 

그가 온 다는 걸 안 이후로 훨씬 마음도 편해지고 기분도 나아졌으면서 나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부러 더 슬픈 척 내 기분을 꾸몄다. 

이번에도 우리 엄마를 걱정하는 발렌틴의 마음을 이용한 나는 미련했고 불효녀였다. 우리 엄마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천인공노했을 것이다. 누구 딸도 아니고 우리 엄마 딸인데. 여장부같은 우리 엄마는

엄마 딸이 이렇게 남자에게 휘둘리고 있는 걸 알았다면 엄청 자존심 상해하셨을 게 분명하다. 


한 한시간 정도가 지났나, 그가 집으로 왔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내 손을 잡더니 날 안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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