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싫지만 어쩌겠어.
사람의 의지는 불가항력이라는 것에 영향을 받을 수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사실 순서가 바뀌었다.
불가항력이 사람의 의지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그 사람의 의지가 있다면 불가항력도 의지 앞에선 힘을
잃을 수 있고 그 사람이 불가항력적인 거라 내 의지가 아무리 굳었어도 소용없었어 라고 하면 그만인 것으로,
난 완벽한 후자의 편에 속했다.
내 의지만 곧았으면 불가항력 따위 눈에 뵈지도 않았을 거지만 난 이게 불가항력적인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돌아온 전 애인을 적어도 '나'는 한번 보고 난 후 완벽히 잊을 수 없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근데 또 난 비겁했던게 걔처럼 다시 관계를 시작해보자 라고 명확하게 설정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난
다시 전 애인과 사귄다고 욕은 먹고 싶지 않으면서 또 그가 다시 남자친구의 자리로 돌아와야만 받을 수 있는
애정과 사랑을 원했다. 욕심쟁이였다.
그 이후 난 끊임없이 발렌틴에게 연락했고, 거의 우리는 말만 안했다 뿐이지 다시 예전의 관게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발렌틴이랑 다시 만난 그 시점 이후부터 난 쥐도 새도 모르게 다시 예전의 의존적인
나로 돌아가 있었고 그에게 끊임없이 감정적으로 의지하고 싶었다.
그때 나에겐 걔가 날 어떻게 생각할까? 란 감정보다 내 외로움을 달래는게 훨씬 더 우선적인 일이었고,
친구가 슬슬 걱정을 했지만 나에겐 I don't care의 일이었다. 사실 예전처럼 맨날 같이 못 붙어있어서 더
힘들고 더 한 부탁도 하고 싶었지만 그 전의 일이 있기에 그것도 나 꽤나 참은거였다.
논문도 안써지고, 락다운이라 할 것도 없고. 그러나 가끔씩 날씨가 좋아질 때면 사람들은 공원에서 맥주나
과자를 사다가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난 같이 할 사람이 없어 항상 쩔쩔매고 안타까워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거 그냥 혼자 해도 됐는데 싶지만 그때는 뭔가 혼자 한다는 것에 왜 그렇게 눈치가 보였는지.
혼자 있는 나를 사람들이 안타까워 할 것만 같고, 그걸 의식하고 있는 내 자신도 보기 싫고 해서 장 보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혼자만의 시간을 밖에서 보낸 적도 없다.
불행하게도(?), 락다운 기간동안 날씨가 좋은 날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난 발렌틴을
우리 집으로 호출했다. 그가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갈 때마다 내 공허감의 크기와 깊이는 더해갔다.
걔를 보내고 문을 닫을때의 그 기분은 끝끝내 익숙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발렌틴이 와서 우리 집에서
딱히 하는 것도 없었지만 난 누군가의 온기가 그리웠던 것 같기도 하다. 그가 한국 예능이나 영화를
보면서 같이 깔깔 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항상 각자 할 일 하다가 가끔씩 뭐 해 먹고.
그렇게 목적 없는 만남이었지만 난 그게 그렇게 나에게 그 당시에 중했다. 이런 걸로 나는 나의 외로움을
해소했지만 그는 슬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첫날의 날 소중하게 여겨주고 언제 또 나랑 헤어질지 몰라서 전전긍긍해하던 그 발렌틴은 역시
환영같은 것이었다. 점점 왔다갔다 하는 것에 있어서 지겨워 했고 힘들어 했으며 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티를 슬슬 냈는데, 그때의 그의 행동은 이해가 안 가는 게 아니라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사실 나도 친구에게 욕을 먹기도 했고. 내 친구는 발렌틴이 이해가 안 가지 않는다고 따끔하게 충고했었는데
"난 너가 발렌틴을 사랑해서 걔한테 연락하고 그러는 것 같지가 않아. 그냥 너가 외롭고 혼자 있기가
싫으니까 너가 부르는거고 걔는 나보다 더 이걸 느끼고 있을 거고. 그것도 야, 한두번이지 너가 계속 그런
식으로 연락하고 그러면 당연히 현타 오는 순간이 있겠지. 너가 그렇다고 해서 걔가 원하는 걸 맨날
해주는 것도 아니잖아." 라고.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면 난 그때는 발렌틴을 내가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다. '사랑'의 정의에 딱 들어맞는 감정까지는 아니었어도 사랑이 없다면 이런 감정은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이건 내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부분 빼고는 내 친구의 말은 다 일리가 있었다.
발렌틴의 태도가 슬슬 변하고 있다고 느낄 때쯤 내가 친구한테 그런 충고를 들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도 점점 내 연락에 NO를 던지는 횟수가 늘어갔다. 처음엔 부르면 부르는 대로 날 보러 왔고 항상 따뜻하게
대해줬지만 조금씩 그는 내가 '언제든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져 갔던 듯 하다. 내가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을 까봐 내가 하는 연락 하나 하나 소중히 여겼던 그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나에게 짜증은
늘어갔다. 그런 그를 인정할 수 없던 나는 당연히 맞불작전을 세워 같이 짜증을 냈고 또 다시 우리는
예전의 우리처럼 싸웠는데 한창 사랑할 때의 싸움말고, 우리가 서로에게 권태를 느낄 때의 싸움의 결과
비슷한 다툼을 했다. 몇 번 난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티내기 위해 그에게 연락을 안하려고 꾹 꾹
참아왔던 적도 있었지만 매번 난 외로움이라는 것에 무참히 패배한 후 그에게 문자했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내 의지는 이미 불가항력이라는 것에 도전할 마음 자체가 없었고 난 불가항력이라는
이름을 빌려서 매번 그것에 진 척 했다.
우리의 관계는 날이 가면 갈 수록 그 무게가 가벼워졌고 그 무게에 반해 우리의 대화 주제는 무거워져갔다.
심각한 분위기가 감도는 날의 횟수가 더 늘어갔고 나조차도 이 만남에 대해 회의감을 느낄만큼 우리는
빠른 속도로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발렌틴은 아직까지 자기가 나에게 했던 짓(?)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왠지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고 불쑥 화를 내다가도 내가 눈물을 꾹 참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면 또 날 안쓰러워 했다. 난 그가 잠시 가드를 내리는 걸 볼때마다 나도 솔직히 내 마음을 전했다.
널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면 내가 미안하다고,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너가 그렇게 느꼈다면 어쨌건
내 잘못이 없는게 아니니까. 그런데 나 좀 도와달라고 그랬다. 나 사실 하루하루 혼자 있으면 너무 우울한데
너가 옆에 있어준 다는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면 그는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건 아주 짦은 시간만 효력이 있었을 뿐 또 나의 연락에
지겨워하는 그를 보며 난 슬퍼했다. 내가 좀 더 마음 굳게 먹고 그 시간만 잠깐 버텼다면 끝이 달라졌을 까
생각도 가끔씩 한다. 뭐 지금 와서 생각해봤자 소용 없는 일이란건 알지만.
그리고 우리는 결국엔 정말 크게 싸우게 된다. 나도 더 이상 날 은근히 깔보고 무시하는 듯한 그의 태도를
참을 수 없었고 그 또한 이 의미없는 만남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우린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크게 싸웠는데 싸우면서도 난 믿을 수 없었다. 우리가 그렇게
헤어져 놓고서도 또 다시 이런 식으로 싸우는 중이라니. 너나 나나 정말 그 헤어짐에서 배운게 하나도
없구나. 서로 아무 말 안하고 돌아오는 길에서도 비참했던 그 기분은 아직도 조금은 생생하다.
우리의 관계는 결국 이런 방식으로밖에 흐르지 못하나 하는 안타까움 하지만 그 안타까움은 안타까움에서
끝날 뿐 내가 어떤 조치조차 취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때의 그 무력감.
'이래서 전 애인은 다시 만나는거 아니라고 그렇게 사람들이 그런거였을까'를 그 때 즈음 실감하고 있었다.
우린 다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가 나에게 보여준 사랑은 다른거라고 생각했는데. 걔가 얼마나 나한테
헌신적이었는데, 했지만 우리의 관계는 이미 변질 된 채였고 예전처럼 밀어내기만 해도 유지되는 그런
속성은 소멸된지 오래였다. 이제 우리는 적당한 밀당이 없으면, 그리고 그를 조금은 불편하게 여기지 않으면금방이라도 무너질 모래성 같은 거였다.
그때의 우리는 다시 믿음과 서로를 향한 존중을 덧대고 덧대어 이제는 다시 이 관계가 불안하게 흔들리지
않게 기반을 탄탄히 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거였는데 그 당시의 나는 전의 헤어짐으로 인해 빠져 있는 부분을
메꾸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간과했었다. 당연히 중간이 없는 모래성은 쌓으면 부서지고 쌓으면 부서지고를
반복했고 우린 결국엔 무너져버렸다.
그 싸움 이후 그는 '더 이상 이제 만나러 오지 않을거야, 그게 아마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
라고 말했고 그 말 이후 난 마음이 무너지는 듯 했지만 또 한편으론 마음을 정말 굳게 먹었다.
너한테 그만 놀아날거라고. 나도 너한테 절대 연락 하지 않을거라고.
그땐 내가 그에게 어떻게 했냐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단지 너가 날 또 먼저 떠난 다는 사실에만 꽃혀
혼자 굳게 마음 먹고 펑펑 울었다.
우리의 마지막의 매듭은 또 한번 이렇게 부실하게 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