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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너머 Aug 16. 2023

13.이번엔 내가 먼저 재회 신청.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무조건 솔직하게 내 연애담을 써보기로 결정했지만 슬슬 걱정되는 것도 사실인게, 내 연애를 지켜보는

분들이 짜증날 수도 있을만큼 우린 헤어졌다 다시 만났다를 반복했다. 지겹도록 말이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정말 이해할 수 없을만큼 특이하고 또

답답해서 속에 천불이 날 수도 있지만, 정말 가감없는 솔직한 내 이야기. 친구들에게 이미 욕은

먹을만큼 먹어서 그 누가 욕해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 웃기겠지만, 정말 사실이 그러하다. 


발렌틴은 내가 이사 간다는 걸 알고 바로 그 자리에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본성이 원래 좀 나이스 한 애라 

그런가, 발렌틴은 내가 무언가를 도와 달라고 그랬을 때 사귀고 있지 않을 때도 절대 거절 한 적이 없었다. 

문제는 나 말고도 모두에게 다 친절을 베풀어줬던 것이었지만. 

여튼 그때 난 그의 도움이 필요했었던 건 사실이었는데 아무래도 3개월간 지내다 보니 살림살이가 

늘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발렌틴의 집에서 살았을 때는 이미 발렌틴이 가지고 있던 걸 사용해도 됐지만

나오고 나선 내가 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단 걸 깨닫고 나서 최소한의 필요한것들을 

사다보니 아무래도 이사할때 가지고 가야할게 늘었고, 처음 이사할 때보다 배로 손이 더 갔기 때문이다.

 

내 계획은 택시를 타고 한번에 옮기는 거였는데 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보니 이미 걱정이 만빵이던 때에

그의 도움은 구원같은 것이어서 난 단번에 그의 도움을 냉큼 받았다. 

그는 저녁 쯤에 나를 달래주러 우리 집에 왔던 거였고 어차피 내일 아침 이사를 빨리 할 예정이었으므로

하룻 밤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안다, 이미 이때부터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는 걔나 그걸 허락하는 나나. 헤어질 애들이라고 보기에는

무리인 상황들이 많았다는 거. 하지만 난 그땐 발렌틴이 필요했다. 가뜩이나 엄마 소식을 듣고 

걱정이 너무 되기도 하고 이사 가야한다는 압박감도 있고 해서 누군가의 존재감이 필요하던 찰나 

그 누구보다 제격인 그가 와준 건 나에겐 안성맞춤 해결책이었다. 그날 밤, 누군가가 집에 같이 있다는 게

나에겐 아주 큰 위로였으며 다음 날 혼자 부산 떨며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그 날 밤 편히 

잠을 잘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됐다. 


그 다음 날,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우린 아침 일찍 택시를 잡아 Pimlico 쪽으로 넘어갔다. 

도착한 새 집에서 내가 머무를 곳은 가장 꼭대기 방이었고 아파트가 아니라 영국식 Flat이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있을리 만무했다. 내가 세번 네번 왔다갔다 했을 짐을 둘이 하니까 한번에 옮길 수 있었고

발렌틴은 같이 짐 정리를 도와주며 내 방을 한번 스윽 하고 점검(?) 했다. 

물론 그는 정말 너무 비싸다며, 너 호화로운 생활 한다고 나무라긴 했지만 그래도 집 자체는 좋다고 해주었다.

난 짐 정리를 마치고 내심 그와 함께 테이크어웨이 전문점에서 저녁 하나 사서 강가에서 좀 먹고 가던가 

아니면 저녁을 우리 집에서 먹고 갔으면 했지만 그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젠 같이 살지 않고 그래서 각자에게 각자가 머무르는 '집' 의 개념이 생기다 보니 발렌틴은 언젠가부터

나와 있다가도 꼭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귀소 본능 같은 걸 보여주곤 했다. 

당연히, 정말 당연히 난 너무 아쉽고 그를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자존심을 굽히고 싶지 않았던

나는 힘겹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날 속속들이 알고 있는 발렌틴은 아마 내 표정이나 말 끝마다 

말줄임표가 붙는 날 보고 분명히 내가 자기와 저녁을 먹고 싶어한다는 걸 알았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짐짓 고민하는 듯 보이더니 그것도 잠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다시 말했다. 내일은

일을 해서 집에서 쉬어야 할 것 같다고. 


그가 돌아가고, 새로운 집에서의 첫 날 밤은 꽤 쓸쓸했다. 예전 집은 운이 좋게도 전체 플랏을 혼자 

쓸 수 있었지만 지금 들어온 집은 주방을 쉐어해야 했으며 거실이 없었고 내가 꼭 필요한 TV도 없었다. 

당연히 돈 없는 유학생 치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던 건 맞지만 뭔가 항상 발렌틴이랑 살면서 넓은 집에 

머무르는게 익숙해졌던 내가 다시 쉐어를 하게 되니 조금은 맘이 불편했다. 이래저래 신경 쓸게 많았고

공용공간을 쓰다가 같이 사는 분들을 마주치는 것도 괜히 불편하고. 

조금은 변한 생활 환경과 반경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첫 날은 쓸쓸했다. 또 이 이후에 그에게 연락할

건덕지가 없었고 당연하게도 그는 나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했으면 내가 했지, 그는 절대로

먼저 나에게 문자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처음 헤어지고 나서 재회 할 때 빼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날씨도 야속하지, 런던 날씨 원래 그렇게 안 좋으면서 왜 꼭 내가 이 런던의 날씨를 완벽하게 즐길 수 없을때

그리도 화창한지. 락다운 내내 날씨 좋은 날이 너무 많아서 괜시리 더 서러워지기도 하고 이사 갔던 그해 4월.

난 집에서 많은 걸 했다. 논문의 갈피가 잡히지 않아 엄청 끙끙댔고, 오전-오후를 그렇게 흘려 보내고 머리를

식힐 겸 거하게 저녁식사를 차린 후 저녁을 먹고 찾아오는 공허감도 수시로 느끼고.

왠지 모르겠는데 맛있게 저녁식사를 했단 마음보단 의무감으로 저녁을 해 먹었던 데다가 굉장히 급하게 

먹어서 밥을 먹는 느낌보다 시간을 때우는 느낌이었다. 이 텅빈 시간을 먹는 행위로 채우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내 4월은 그렇게 어중간한 루틴의 하루들로 채워졌다. 그 때 쯤엔 후회도 많이 했다. 그냥 락다운 터지고 

발렌틴이랑 헤어 졌을 때 한국에 잠깐 들어갈 걸. 어차피 돈도 못벌고, 다 온라인 수업이었기 때문에 

굳이 영국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는데. 지금도 후회했다고 인정하기 싫지만 아직도 후회한다. 굳이 굳이

영국에 남아서 집값으로 돈을 다 써버렸으니. 비겁한 변명을 해보자면 영국으로 들어온지 3달도 채 되지 

않아 한국으로 간다는 사실이 뭔가 너무 자존심 상했다. 그렇게 별 생 난리부르스를 치고 들어왔는데, 

친구들한테 선물도 받고 격려도 받으면서 들어왔는데 락다운 터지고 헤어져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야 

하는 꼴이라니. 지금에서야 사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어쩔 땐 더 큰 용기이며 자존심보다 그 용기가 

더 중할 수 있단 걸 알지만 그때는 그걸 알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딸래미가 그렇게 고집 피우는데도 결국엔 믿어준 우리 부모님한테 감사하다. 


4-5월은 그렇게 텅-빈 채로 지나갔다. 반복되는 우울한 하루하루에 난 지쳐가고 있었고 그의 존재가 

더 절실해졌다. 약 두달간 그와 만나지 않으면서 내가 생각한 것 그 이상으로 그를 많이 생각하고 있단 걸

깨달았고 성급하게 난 그가 필요하고 그에게 다시 연락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연락은 나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는데 단지 오늘 하루 그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가 아닌

우리 관계 재생을 재고 해보라고 말하려는 목적이 있는 만남을 청하는 거였기 때문에. 

수많은 생각들과 단어들, 고민들을 정리하느라 정말 힘들었지만 그에게 확실한 의사표현을 하기 위해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말을 하는지 다듬고 또 다듬었고 그를 Green park 에서 만나기로 했다. 


예전의 그 비참한 이별의 흔적은 6개월 정도 넘어가니까 흐려진지 오래고 지금 나의 감정과 그의 

다정함만 선명하게 남아 다시금 예전의 우리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끝을 알 수 없는 희망의 형태로

나에게 돌아왔으며 그래서 난 먼저 다가가기로 결심했다. 

난 그 날 머뭇머뭇 거리다가 공원에 앉아 말했다. 


"내가 이렇게 너한테 다시 말하는게 쉽지 않았을 거라는 건 너도 알 거라고 생각해. 어쨌건 우리는 그렇게

좋게 끝났던게 아니었으니까. 또 우린 다시 만나고서도 헤어졌잖아. 그래서 이렇게 너한테 말하는 게 

맞는 건지 나도 고민했지만 신중하게 생각해본거야. 이번엔 정말 나도 이 관계를 위해서 노력 해볼거야. 

나 지금 정말 떨리고 두렵거든? 근데 말 안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난 너랑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꼭 지금 답을 주라는 건 아니야. 아무래도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란 거 충분히 이해하니까 

생각 깊게 해보고 연락 줘. 내 마음은 이런데 너도 그럴 의향이 있는지." 라고. 


그는 미묘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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